<故事成語>직정경행(直情徑行) 등 2편 (357회) ◆직정경행(直情徑行)◆징갱취제(懲羹吹) 입력시간 : 2014. 12.22. 00:00
감정이 내키는 대로 길을 가다. 곧 상대의 생각이나 주위의 사정 등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함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과 자유(子遊)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부모를 여의고 심히 비탄에 빠져 있는 소년을 보았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은, 그곳을 떠난 다음 방금 본 광경에 관련해 예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먼저 유약이 말했다. "나는 상례(喪禮)에 곡용(哭踊)의 예(곡을 하고 발버둥질을 하는 예)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 몰랐으며,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비탄해 하는 모습을 보고, 죽은 사람에 대한 애석의 정은 실로 이 곡용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시 옛사람이 행한 예에는 각각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자 자유도 말했다. "그렇다. 그리고 예라는 것은 동시에 정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자가 정에 지나치면 몸을 상하기 때문에 예로써 이를 제한하며, 또 불초한 자는 정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갖춤새로 마련하여, 그로써 정을 생각케 한다. 이것도 예의 효용이다. 감정이 내키는 대로 전후 분별도 없이 행동하여 절제할 줄 모르는(直情徑行) 것은 야만인의 길이며, 군자는 항시 정이 일어나는 것을 이성으로 제어해야만 한다." [출전]《禮記》<檀弓篇(단궁편)> ◆징갱취제(懲羹吹)=懲:징계할 징. 羹:국 갱. 吹:불 취. :냉채 제.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후후 불고 먹는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함으로써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의 비유.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초(楚) 제(齊) 두 나라뿐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재상 장의(張儀)는 초 제 동맹의 강화론자(强化論者)인 초나라의 삼려 대부[三閭大夫:소(昭) 굴(屈) 경(景) 세 왕족의 족장(族長)] 굴원[屈原:이름은 평(平), B.C. 343?∼277?]을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렸다. 이윽고 초나라 회왕(懷王)의 총회(寵姬) 정수(鄭袖)와 영신( 臣) 근상(勤尙) 등이 굴원을 증오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장의는 곧 그들을 매수하여 굴원의 실각 공작을 폈다. 드디어 굴원이 조정으로부터 축출되자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면 진나라의 국토 600리를 할양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했으나 장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을 안 회왕은 분을 참지 못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패하고 도리어 접경 지역의 국토까지 빼앗겼다. 회왕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굴원을 다시 등용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B.C.299) 어느 날 진나라로부터 우호 증진이란 미명 아래 회왕을 초청하는 사신이 왔다. 굴원은 믿을 수 없는 진나라의 초청에 응해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방대했다. 그러나 회왕은 왕자 자란(子蘭)의 강권에 따라 진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그 이듬해 객사하고 말았다. 초나라에서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동생인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란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도리어 참소(讒訴)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 또다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 후 10년간 오직 조국애에 불타는 굴원은 망명도 하지 않고 한결같이 동정호(洞庭湖) 주변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울분이 복받친 나머지 멱라(汨羅:동정호 남쪽을 흐르는 강)에 몸을 던져 수중 고혼(水中孤魂)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의 넋을 '멱라의 귀[汨羅之鬼]'이라 일컫고 있다. 《초사(楚辭)》에 실려 있는 굴원의 작품 중 대부분은 이 방랑 시절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는 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걱정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영신을 미워하며 그의 고고한 심정을 정열적으로 노래했는데 '징갱취제'는《초사》〈9장〉중 '석송(惜誦)'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체까지 불고 먹는데 [懲於羹者 而吹 兮(징어갱자 이취제혜)] 어찌하여 그 뜻(나약함)을 바꾸지 못하는가 [何不變此志也(하불변차지야)] ‥‥ '석송'은 굴원이 자기 이상으로 주군(主君)을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을 분노하며 더욱이 어쩔 수 없는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그 절조만은 변절하지 않겠다는 강개지심(慷慨之心)을 토로한 시이다. [동의어] 징갱취채(懲羹吹菜) [출전]《楚辭》〈七章 惜誦〉 출처//http://peerhs.com.ne.kr/gosa/go1.html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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