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說] 화순에는 최경회와 주논개가 있었다.

주논개, 조선의 영조대왕이 기생이 아닌 최경회의 ‘첩’ 으로 표기
“해주 최씨 문중은 조상의 추모제를 직접 거행하기를”
전라 능주(綾州)에서 해주 최씨 최천부(崔天符)의 아들로 태어나


입력시간 : 2023. 10.12. 00:00


최경회와 주논개 영정
최경회 선생과 주논개의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최경회선생과 주논개 부인의 시신은 두 분의 순절 이후 장수군 사람들이 두 분의 시신을 수습하며 고향인 장수로 향하던 중, 한 여름 시신의 부패가 심하여 함양의 산 중턱에 급히 매장을 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아무 연고도 없는 함양에서는 지금까지도 최경회 선생과 의암 주논개의 사당을 짓고 성역화까지 하고 이를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최경회의 태생인 화순 능주에서는 최경회 시신의 수습을 위한 아무 역할도 없었고 주논개 태생인 장수군 사람들이 최경회 선생과 주논개 부인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수까지 옮기려다 진주와 장수의 중간 지역인 경상도 함양의 한 산중턱에서 가묘를 쓰게 됐느냐는 것이다.

현재 화순 최경회 선생의 사당에서 최경회 선생 선양회는 매년 10월10일 화순군 예산으로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나 충의사 경내에는 부인인 주논개의 영정만 있었지 밥 한그릇 진설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최경회 선생만 추모제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화순군 최경회 선생(宣揚會)선양회에서도 최경회 선생과 의암 주논개 부인을 함께 추모하는 방법도 좋을 듯 하다

그 이유는 논개부인은 "충의공 최경회선생 둘째부인"으로, 진주에서는 아직까지 관기로 쓰고 있으면서도 논개각을 만들어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진주성에서는 문화해설사들이 관광객들에게 논개 부인이 아닌 기생 논개로 설명하는 것도, 우리 화순이 나서서 고치게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최경회 선생 첫째부인인 나주 김씨가 논개부인에게 죽기 전 간곡히 최경회 선생을 모셔달라"는 부탁도 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조선의 영조대왕 때 충의공 최경회선생 시호를 내리기 위해 작성한 "태장시장록"에도 논개부인를 기생으로 표기하지 않고 최경회의 첩(둘째부인)으로 표기한 기록이 있다.

때문에 매년 충의사에서 열리는 추모제에 논개 부인도 함께 추모제를 모시는 것이 후손으로서 마땅 할 처사가 아닌가 본다.

한편 최경회는 1532년 전라도 능주(綾州)(現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해주 최씨 최천부(崔天符)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응정(梁應鼎), 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 명종 1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에 이어 옥구, 장수, 무장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후처인 논개는 장수현감을 할 때, 논개의 숙부가 민며느리로 팔아버린 것을 논개의 어머니가 다시 찾아온 송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들 모녀가 거처할 것이 없음을 말하자 관청에서 지내게 배려하였다.

이후 무장현감으로 임명될 때 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는 이어 영암군수와 영해,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모친 평택임씨가 임종하여 상을 치우기 위해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인 화순으로 낙향하였다. 1592년 모친의 삼년상 기간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 형 경운(慶雲)과 둘째 형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한다. 그는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조카 최홍재로 하여금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 합류하여 왜군과 전투케 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글/최재승 [파인뉴스 대표 . 칼럼니스트]


파인뉴스 기자 470choi@daum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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