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具)씨는 원래 구(仇)씨로서 중국 송(宋)나라 대부 구목(仇牧)의 후예(後裔)이다. 중국 춘추(春秋)시대에 송나라 왕 송민공에게 낭궁장만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힘이 장사이고 우직한 낭궁장만은 노나라의 전쟁에서 화살을 맞고 포로로 억류되었으나, 송민공이 특별히 돌려달라는 요청으로 송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나라에서 돌아온 남궁장만은 송민공에게 절을 올리자, 송민공이 남궁장만에게 ‘과인은 그대의 용력을 존경해 왔다. 그러나 노장공의 화살을 맞고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존경하랴? 이제는 그대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신하들이 일제히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인이 그대와 허물없이 지내기에 농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또한 그대가 포로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신하들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신하인 구목(仇牧)이 정색을 하고 아뢰었다. "신하들을 희롱하면 신하들이 진심으로 주공을 존경하지 않게 되옵니다. 존경하지 않으면 복심(腹心)이 생기게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 천하가 어지럽고 여러 제후국에서 패륜(悖倫)과 시역(弑逆)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군신간에 공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는 구목(仇牧)의 이야기가 전한다. 창원구씨가 우리나라에 귀화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시조 구성(仇成吉)길이 945년(혜종 2년) 공을 세워 의창군에 봉해지고 가세를 일으켰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그 후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세종 때 홍문관 직제학을 지낸 구종길을 중시조로 하였으며,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791년(정조 15년)에 구(具)씨로 사성을 받아 성을 바꾸었다. ◆평해 구(丘)씨 구(丘)씨는 구(邱)씨와 같다. 구씨의 발상지는 산동성 치박시 임치(臨淄)이다. 강태공의 후손이 구(邱)로 사성을 받으면서 생겼으며, 주로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산동성 제남시와 하남성 회양현이다.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 황락(黃洛)은 신라 유리왕 5년 AD 28년에 구대림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월남)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길에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류하여 도착한 곳에 자리잡고 살았다. 현재에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 지역에는 황락의 황장군묘가 전해지며, 구대림의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고려 공민왕 때 민부전서를 지낸 구선혁(丘宣赫)을 1세조로 하고, 평해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평해 구씨의 원래 시조는 강태공으로 진주 강씨들과 마찬가지로 매년 산동성 치박시 임치에서 제사를 함께 모신다. ◆著者 姜元求 박사의 프로필 現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現광주여행문화원 원장/現 중국 심양시 명예시민/ 前 전국시도관광협회연합회장/前 광주광역시관광협회장/ 前 광주권발전연구소장/前광주상아탑학원 원장 연락처 : 한중문화교류회(062)652-8800 http://shtong.co.kr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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