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은 정말 반란을 꾀했을까?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기록인 '기축옥안'은 3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통에 불타 없어지고 만다. 이희권은 "정여립의 거사 계획은 <선조실록>에는 없던 것이 <선조수정실록>에서 처음 밝혀졌는데, 이는 서인정권인 인조 21년 이후 김류, 이식, 김육 등에 의해서 개수된 것"이라며 "말하자면, 동인인 정여립의 역모사건은 서인의 시각에서 재조명한 기록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구본창은 정여립 역모사건이 허위인 이유로 첫째.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물적 증거가 단 한 가지도 없고 오로지 관련자들의 자백이 유일한 증거라는 점, 둘째, 대동계는 역모를 준비하기 위한 비밀 조직이 아니라 관의 요청에 협조하던 공개된 조직이라는 점, 셋째, 정여립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고발이 있던 날, 아무도 정여립의 반란을 믿지 않던 상황에서 정철은 정여립이 도망쳤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는 점, 넷째, 당시 조정은 동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정여립은 동인이었고 또 동인세력의 실세였기 때문에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 다섯째,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후에 명예회복되었는데, 명예회복될 수 있었다는 것은 정여립 사건이 진짜 역모사건은 아니었다는 반증 아니겠느냐는 점 등이다. <동소만록>에는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놀이 삼아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어 애초 정여립은 정철 등 서인들의 치밀한 계략에 의해 살해당한 뒤 역모로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부모와 자식들은 모두 교살되었고 살던 집은 역적의 기운을 묻어버리기 위해 땅을 파 숯불로 지지고 연못으로 만들어 지금은 파소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선조대의 정여립 사건은 조선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출구가 되고 있다. 호남은 기축옥사로 인해 기대승 이발 등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호남학파의 맥이 끊기게 되고, 단재 신재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선 5백년내 제일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개혁적 선비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면서 조선의 개혁도 함께 물건너 갔으며, 보수적 담론만이 지배한 조선은 결국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의해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경제위기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대응은 감세와 정부지출 확대라고 한다. 그리고 은행권과 건설업계 및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 위해 200조에 달하는 국민세금을 쏟아 붇기로 했다. 99%나 되는 자영업자, 중소기업, 그리고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은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남북간 적대감만 조장하여 남북교류마저 끊길 위기에 놓여 있고, 지금이라도 사회안전망을 만들 생각도 없이 조속하게 한미FTA를 추진하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한 개혁진보세력의 몰락과 보수적 담론의 등장이 망국의 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김상집 <참여자치21 이사장>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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