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염정 액자, 詩의 12 주인공들(1)
시의 주진공은 조선시대의 고위고관들 !
"한글로 번역 해서 詩石이나 詩板으로.해야"
입력시간 : 2008. 12.07. 00:00확대축소


화순군 이서면 물염정은 그 주위 경관이 빼어나기도 하지만 물염정 내부에 게시된 시문의 주인공이 옛 조선시대의 '고위고관' 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물염정 보존위원회 나영채 회장은 "한자로 된 시문을 한글로 번역해서 관광객의 눈에 잘 보이게 해야한다" 고 주장하고 또 " 아직은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세상에 공표하게 되면 관광자원으로서 가치를 높이게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를 써서 물염정 천장에 게액한 12명의 조선시대 고위고관들을 차례로 소개한다.(편집자 주)

◆영의정을 4차례나 지낸 김재로(金在魯)

김재로 金在魯 1682(숙종 8)~1759. (영조 35)는 이조 영조 때의 재상.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시호는 충정(忠靖), 본관은 청풍(淸風), 우의정 구(構)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1721년 신축사화 때 화를 입었으나 영조 초에 풀려 나와 4차례나 영의정이 되었다. 충순청빈(忠順淸貧)한 재상으로 영조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

서용보 徐龍輔 ?~1824(순조 24)는 이조 중기의 명신. 자는 여중(汝中), 호는 심재(心齋), 시호는 익헌(翼獻), 본관은 대구, 판서 유령(有寧)의 아들. 1774년(영조 50) 생원에 합격, 이어 문과에 급제한 후 순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왕과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신뢰가 두터워 항상 측근에서 받들었고 민심이 불안할 때도 나서서 안정시켰다.

◆영의정 6차례나 지낸 정태화(鄭太和)

정태화 鄭太和 1602(선조 35)~1673(현종 14)는 이조 현종 때의 대신. 자는 유춘(?春), 호는 양파(陽坡), 시호는 익헌(翼憲), 개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동래(東萊), 참판 광성(廣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1628년(인조 6) 아우 치화(致和)와 함께 문과에 급제, 1634년(인조 12)에 청나라 사신의 원접사 종사(遠接使從事)로 뽑혔고, 1635년에 북변의 위급에 대비하여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자 원수 종사(元帥從事)로 뽑혔다.

1636년에 청군(淸軍)이 별안간 입구(入寇)하여 원수는 도망하고 우리 군사는 대패하였는데 태화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현관(縣館)에 의지하여 항전, 전과가 많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들어가 그 재주와 인물을 떨쳤다.

조선으로 돌아와 호령안찰사(湖嶺按察使)가 되었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명(明)나라와 밀약(密約)을 체결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청나라에게 탄로되어 난처하게 되매, 태화를 갑자기 봉황성(鳳凰城)에 보내어 청인의 공갈을 잘 막아내게 하여 일이 무사했다.

그 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6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다. 1671년(현종 12)에 기사(耆社)에 들어갔는데 병으로 조정에 나갈 수 없으므로 현종은 가마를 타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좌의정을 지낸 명재상 정지화(鄭知和)

정지화 鄭知和 1613(광해군 5)~1688(숙종 14) 이조 숙종 때의 대신.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 명상(名相) 광필(光弼)의 5대손이다.

이조참판(參判) 광경(廣敬)의 아들. 일찍 진사에 합격,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아버지와 같이 남한(南漢)에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이듬해 제릉(齊陵) 참봉이 되고, 그 해 정시(庭試)에 장원하였다. 사서(司書)로서 왕세자를 따라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교리(校理), 이랑(吏郞),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인(舍人) 등을 거쳐 원주(原州) 목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책봉에 대한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 병조 참의(參議),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전라, 함경, 평안 관찰사를 역임, 형조판서에 승진하여, 호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74년(현종 15)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그 때 양사(兩司)에서 대비(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로 송시열(宋時烈)과 의례제신(儀禮諸臣)의 추죄(追罪)를 상소하자, 그에 극력 반대하였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좌의정을 지냈다.

◆정송강의 아들, 좌의정 추증 정홍명 鄭弘溟

정홍명 鄭弘溟 1592(선조 25)~1650(효종 1) 이조 때의 학자.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연일(延日), 좌의정 철(澈)의 아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했다.

문학(文學)으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죽은 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고문(古文)에 밝았고, 유학(儒學)도 장유(張維)와 같이 사계의 학을 계승하였다. 저서로는 기암집이 있다.

◆김수항 영의정의 아들로 대제학 삼연

김창협 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이조 숙종 때의 학자. 자는 화중(和仲), 호는 농암(農巖),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안동,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창집(昌集)의 아우. 1669년(현종 10)에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1682년(숙종 8)에 문과에 장원하여 대사성, 청풍부사(淸風府使)에 이르렀으나 1689년(숙종 15) 가시환국(己巳換局) 때에 아버지가 진도(珍島) 적소에서 사사된 후, 벼슬을 단념, 대제학 예조판서로 여러 차례 등용되었어도 끝내 사양하였다.

<다음주에 계속>


최재승 기자 jachi2580@hanmail.net        최재승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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