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어느 곳이나 여행이 자유화되었지만, 여순감옥만은 아직 개방이 되지 않는 곳이다. 몇년 전 대련시 부시장과 만찬 중에 “한국인들이 여순감옥 보는 것을 가장 원하며, 나도 여러 차례 대련에 왔지만, 아직 한 번도 가지 못했다.”라고 말하자, 즉시 허가를 받아 가보았다. 여순감옥을 못 보게 하는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나, 일본인들이 대련에 많이 투자한 관계로 일본과 마찰을 피하기 위한다는 것과 여순 앞 바다에 중요한 해군시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감옥에 들어가 보면 신채호선생이 갇혀 있던 방에 초상화까지 걸려 있으며, 신채호선생에 대해 약력이 적혀 있었다. 또한 안중근의사가 갇혀 있던 방과 사형 집행된 장소가 달리 있다. 사형집행 장소에 중국 정부에서 태극기를 비롯하여 조화로 잘 장식되어 엄숙하게 만들어져 있다. 앞으로 한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같으면 요란을 떨면서 모든 언론에 보도되었을 것인데, 중국에 많이 가본 나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잘 갖추어 놓았으며, 중국 정부의 허가만 있으며 바로 공개한다는 것이다. 신채호선생은 1935년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서울의 친지들이 선생의 옛 친구인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을 종용하였으나,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며 단호히 이를 거절하였다. 1936년 여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급보에 접한 부인과 아들이 여순으로 달려갔으나, 2월 21일 57세로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끝에 체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 왔다. 당시 국내의 각 신문에서는 순국하여 말없이 환국한 선생을 애도했다. 신채호 선생은 어머니의 집인 대전에서 출생해 청원군에서 성장했다. 1912년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호적제를 도입하자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한 인물로, 광복 후 정부가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해 사실상 호적 없는 상태였다. 지난 3월 18일 서울가정법원은 독립운동가에 대해 가족관계 등록부 창설을 허가하도록 결정했다. 이번 정부 결정은 97년이나 지났으니 너무나 늦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후손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신채호 선생의 유족들이 국적도 호적도 없는 선생을 위해 법원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족들은 국가의 지원은 고사하고 단재 선생이 살았던 집이며, 전답마저 상속받지 못한 채 선생의 기념사업비를 대기 위해 동분서주해 왔다. 국회에서 여러 차례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다가 흐지부지 되는 경우도 있었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정부 입법으로 호적 창설의 길이 열렸다. 생존자를 기준으로 작성되는 호적에 독립유공자를 위한 예외 조항을 둔 덕에 올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그 무엇보다 이번 애국선열들의 국적회복의 일등공신은 단재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여사이다. 1967년 단재선생의 아들인 故신수범과 결혼한 이 여사는, 70년대 초 첫 아이의 호적등재를 하다가 남편이 호적상 사생아로 등재되어 있음을 알고 기절초풍을 했다고 한다. 신채호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의 태두(泰斗)이다. 특히 조선상고사를 저술하기 위하여 만주벌판을 수 차례 답사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선생을 아직까지 호적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너무나 크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강원구 <동신대 초빙교수.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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