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朱子: 1130~1200)는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둔옹(遯翁). 이름 희(熹).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했다. 선조는 대대로 휘주 무원(徽州 ?源)으로 옛날에는 안휘성에 속했으나, 지금은 강서성 무원현에 속한다. 그의 선대는 호족으로 아버지 주위재(朱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논적 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서원(鵝湖書院)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 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2왼쪽> 신안주씨의 시조 주잠(朱潛)은 원래 송나라 신안(新安: 강서성 무원현) 사람으로, 유명한 주자선생의 증손이다. 주자선생은 무원현에 자주 들린 기록이 있다. 주자선생의 선조들의 고향은 강서성 무원현(?源縣) 사람이다. 무원현은 옛날 신안현이었다. 지금은 강서성이지만, 옛날에는 안휘성 휘주 무원현이었다. 휘주는 현재 황산시에 속하며, 전당강(錢塘江)의 지류인 신안강(新安江)이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 주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주잠은 아들을 데리고 섭공제(葉公濟),조창(趙昶),진조순(陳祖舜) 등과 함께 바다를 건너 고려 고종 때에 망명해 와서 나주(羅州)에 자리잡고 살았다. 그 후 원나라에서 송나라의 유민 다수가 고려로 달아난 사실을 알고 그들을 압송할 것을 고려에 요구해 오자, 주잠은 이름을 주적덕(朱積德)이라 고치고 능성(화순군 능주면)에 숨어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안주씨의 연원이 되었다. 그의 아들 주여경(朱餘慶)이 고종 때 은사과(恩賜科)에 올랐고, 주여경의 아들 주열(朱悅)이 또 문과에 올랐다. 주열은 벼슬이 한림학사,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충렬왕 때는 1품직인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를 거쳐 능성군에 봉해졌다. 화순군 능주면에 주자묘(朱子廟)가 있어 중국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著者 姜元求 박사의 프로필 現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現 동신대학교 초빙교수. 現광주여행문화원 원장/現 중국 심양시 명예시민/ 前 전국시도관광협회연합회장/前 광주광역시관광협회장/ 前 광주권발전연구소장/前광주상아탑학원 원장 연락처 :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062)652-8800 http://www.hanjoong.pe.kr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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