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표씨 시조 표대박(表大王+卜)은 중국 후주(後周) 사람이다. 서기 960년(고려 광종11년) 송나라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장(張). 방(方). 위(韋). 변(邊). 윤(尹). 진(秦). 감(甘). 황보(皇甫) 등 8성씨를 인솔해 고려로 망명한 후 귀화했다. 그 후 고려 충숙왕 때 좌리공신을 지내고 신창백에 봉해진 표온창을 1세조로 하고 신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신창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의 지명이다. 연산조에 대사헌에 오른 남계 표연말은 신창표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스승 김종직의 강력한 권유로 뒤늦게 문과 별시에 응시하여 급제한다. 그때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이 펼쳐진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연산군의 비행을 직언으로 간하는 상소를 되풀이한다. 그의 상소문 가운데 ‘오조소(五條疏)’는 유명하다. 첫째 왕이 학문과 도덕을 좋아하지 않고 유희만을 선호하는 것을 삼갈 것. 둘째 간신배를 멀리하고 현자(賢者)를 신임할 것. 셋째 충신의 옳은 의견을 들어 채택할 것. 넷째 죄 없는 사람을 벌주지 말 것. 다섯째 친척 등 개인의 정에 얽매이지 말아야 나라가 잘된다."는 칼날 같은 직언이다. 결국 그는 모함을 받아 무오사화 때 유배되는 도중 눈을 감는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5명의 문과급제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시조 표계(表繼)의 아들 표연말(表沿沫)이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원년에 응교(應敎)로 있으면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밖에 선조 때의 표헌(表憲)과 그의 아들 표정로(表廷老)는 당대의 명역관(名譯官)■명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인조 때의 무관 표정준(表廷俊)은 척화신(斥和臣)으로 청나라에 잡혀가는 김상헌(金尙憲)을 끝까지 수행하여 칭송을 들었다. ▶임구풍씨(臨駒馮氏)
풍(馮)씨의 득성(得姓) 시조는 풍이(馮夷)이다. 발상지는 하남성 영양(榮陽)시이며, 세거지는 섬서성 흥평(興平)현이다. 임구(臨駒)의 지명은 산동성 유방시 임구(臨駒)현이다. 풍씨(馮氏)의 발원지는 하남성 신정시(新鄭市)로 춘추전국시대 정(鄭)나라의 대부 풍간자(馮簡子)가 시조이다. 신정시는 하남성의 수도인 정주(鄭州)시의 현급시이며, 현재 정주 국제공항이 있는 지역이다. 풍씨의 인물로는 풍옥상(馮玉祥)장군으로 서안(西安)에 풍옥상 거리가 있으며, 산동성 태산(泰山)이 있는 태안(泰安)시에 묘가 있다. 우리나라 임구풍씨는 중국 명나라시대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내던 중 청나라의 침공으로 적에게 포로가 되어 심양(沈陽)에 갇혀있었다. 병자호란(1636)으로 인질로 잡혀간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만나 가깝게 지내던 중 1645년 인조 23년에 귀국할 때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명나라의 한 사람인 풍삼사(馮三仕)이다. 삼사는 본래 명나라 산동성 유방시 임구현 사람이다. 명나라 말기에 청군(淸軍)이 명을 침공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우다가 붙잡혀 심양(瀋陽)에 억류되어 있다가, 병자호란(1636)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귀국할 때 수행하여 귀화하였다. 시조인 풍삼사의 고향인 임구를 본으로 삼았다. 풍삼사. 왕봉강 등 9의사를 조정에서는 황조(皇朝) 유민으로 극진한 예우를 갖추고, 특별히 대접해 주었다. 중국 요녕성 요녕대학 풍옥충(馮玉忠) 총장은 한국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항상 임구풍씨 사당을 찾기도 하였다. ◆著者 姜元求 박사의 프로필 現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現 동신대학교 초빙교수. 現광주여행문화원 원장/現 중국 심양시 명예시민/ 前 전국시도관광협회연합회장/前 광주광역시관광협회장/ 前 광주권발전연구소장/前광주상아탑학원 원장 연락처 :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062)652-8800 http://www.hanjoong.pe.kr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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