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호> 아름다운 생의 의지
입력시간 : 2009. 07.23. 00:00확대축소


태풍과 비바람이 불어닥치면 많은 꽃들이 떨어져버린다. 꽃이 떨어져버리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꽃이 있게 마련이다.

오·헨리라는 소설가는 「마지막 잎새」에서 자신의 병실 밖에 있는 담쟁이 잎새가 모두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를 위해 담장벽에 잎새 하나를 그리는 화가 이야기를 썼다.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 잎새를 통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때 친하게 지내는 후배 하나는 자의식이 강해 비장애인인 우리들에게 늘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였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공모전에서 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은 후 거동이 아주 불편했지만 누구에게 쉽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한 번은 동아리에서 곡성에 있는 어느 산을 등산한 적이 있었다. 바위가 많아 오르기 힘든 산이어서 전문 등산가도 아니고 어쩌다 하는 등산이어서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 했다. 한참을 산을 오르다가 문득 소아마비 후배가 떠올라 찾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매정하게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모두들 가다 쉬다를 하면서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산을 내려갔다.

그때 지팡이를 손에 쥔 소아마비 후배가 구슬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옷은 모두 땀에 젖었지만 벌겋게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의 곁으로 가 부축해 줄 요량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그 후배는 갑자기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가 먼저 가버려 화가 난 줄 알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후배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을 장애인으로 보지 말라는 표시였다. 나는 한참동안 후배와 실랑이를 하였다.

`내가 너의 어깨를 잡은 것은 우정이다'라고 하는 나의 생각과 `그것은 동정이다' 또는 `내 의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겠다'는 후배의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후배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나는 평상시의 내 걸음대로 산을 올랐다. 동아리 회원 모두 산 정상에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소아마비 후배 이야기를 해줬다. 한참만에 소아마비 후배가 정상에 올라왔다. 우리는 그야말로 꼴찌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 후배는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나뭇가지며 바위를 쥐어잡고 마치 네 발 짐승처럼 산을 오르다보니 사방이 나무와 바위에 할퀴어 피가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배는 나중에 나에게 고백하였다. 산을 오르면서 나에게 고백하였다. 내게 화내었던 것과 등산 도중 힘들 때 내게 내민 손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산에 오르고 보니, 이제 무슨 일이든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럽고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 소아마비 후배는 자신의 전공인 경영학을 잘 살려 훌륭한 기업가가 되었으며, 서예가로서 출중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소아마비 후배와의 등산 추억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나는 새해를 맞아 무등산을 오르면서 입석대쯤에서 60대로 보이는 초로의 부부를 만났다. 남편은 다리가 없었다. 부인 또한 한쪽 어깨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새해 벽두부터 무슨 생각이 들어 무등산, 그 높은 산을 올랐는지가 궁금했다.

그냥 눈웃음으로 스쳐가는 등산객이었지만 그 많은 등산객 중에 내 심연의 깊은 곳에서 그들을 간직하고 있는지……. 그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가끔 선하게 미소짓던 그들의 미소와 땀방울을 떠올릴 것이며, 그들이 왜, 무슨 생각으로 무등산에 올라왔는지를 훤히 알고 있는 나는 내 생을 통해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 하나로 오래 기억할 것이다.

오늘날 예측할 수 없는 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이 되고 있다. 처음 장애인이 되면 절망과 깊은 시름에 빠진다고 한다. 그러나 장애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지까지는 불구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굳건한 의지로 자신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랬을 때 장애는 좀 불편할 뿐 자신의 인생 자체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져도 나무는 제 생의 짐을 부려놓지 않고 자란다. 그것이 꼭 큰 집의 대들보가 되지 못할지언정 그 부러진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새겨넣어 고귀한 장롱이 되거나 가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부러진 나무가 피워내는 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강 경 호 <시인·문학평론가·계간《시와사람》발행인>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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