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를 중심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만주·서울·러시아 등의 독립단체들을 연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호는 규암(圭巖). 중국 간도에서는 최세평, 상하이에서는 왕장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875년(고종 15) 8세 때부터 10여 년 동안 오삼렬(吳三烈)·남종구(南宗九)·주봉의(朱鳳儀)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1899년(광무 3) 함경북도 종성에서 김정규(金定圭)·문정호(文政鎬)·문치정(文治政) 등 10여 가구와 함께 간도의 명동(明東)으로 이주, 임야 수백 정보를 개간하여 한인 집단부락을 건설했다. 그곳에 규암재(圭巖齋)라는 사숙(私塾)을 설립하여 한적(漢籍) 수백 권을 비치하고 한인 청년들을 교육했다. 1908년(융희 2) 종제(從弟) 김학연(金學淵)과 함께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워 숙감(塾監)이 되고,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명동교회를 세웠다. 1910년 3월 명동서숙의 교세(校勢)가 확장되자 교명을 명동중학으로 바꾸고 교장에 취임하여, 문재린(文在麟)·윤영석(尹永錫)·서왈보(徐曰甫)·나운규(羅雲奎)·윤동주(尹東柱) 등을 배출했다.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힘썼다. 1915년 명동중학 증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1917년 간도 한인교포들을 위한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다. 이듬해 교포들의 단결을 호소하여 간민회(墾民會)라는 동포들의 자활활동 단체를 조직했다. 1919년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 니콜리스크 회의에 출석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여운형(呂運亨)·이동휘(李東輝) 등을 찾아가 만주·서울·러시아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전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해 3·1운동의 영향으로 간도 명동중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간도로 돌아오다가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옌지[延吉] 감옥에 3년 동안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다시 명동중학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이듬해 명동교회에서 장로회 목사가 되었다. 그뒤 만주지역 한인의 대부분이 용정(龍井)으로 이사하면서 명동중학학생 대부분이 용정 은진(恩眞)중학에 편입하자 명동중학을 폐교했다. 1938년 은진중학 이사장에 취임했고, 만년에는 전도사업에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최 원 규 글 대서) 김윤권 기자 kykks7@hanmail.net 김윤권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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