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선 후기의 윤두서(1668-1715), 말기의 허련(1809-1892)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데, 특히 양팽손은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본관은 제주로 1488년 9월 19일 전남 능성현(현 능주) 월곡리에서 양이하의 아들로 출생하여 1545년 8월 18일 학포당에서 타계했다. 그의 사후 3백년 이상 지난 1863년(철종 14년) 혜강이란 시호를 받았으니, '부지런하고 사가 없으므로 '혜'라 하고 연원이 유통하므로 '강'이라 한다'는 뜻으로 한평생 일관된 삶의 태도와 성품을 잘 대변한다 하겠다. 여섯 살 연상으로 1510년 생원시에 같이 등과 한 조광조(1482-1519)는 그와 평생 뜻을 같이한 지인인데, 그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을 초월한 사람’이라 묘사했다. 조광조의 유배당시 곁에서 함께 한 이가 학포였고 조광조가 타계하자 학포는 그의 사신을 수습하였다. 58년 간의 삶 동안 올곧은 행동으로 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으며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문인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송흠(1459-1547) 문하에서 수학했고, 20세인 1507년 향시에 참여, 29세인 151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관원 정원,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다.
32세인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재상들이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류를 몰아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이 삭탈된 뒤 낙향했다. 고향에 학포당을 짓고 은거하여 서화에 잠심하였다. 50세에 관직이 회복되었고, 타계 1년 전 용담현령에 제수되었다. 그의 문학적인 위상을 살필 수 있는 문집이 남아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에 관한 언급은 중종(中宗) 12년부터 36년까지 25년 동안 40여 회에 이른다. 한미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이 두드러졌고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벗들이 그의 촌스러움을 헐뜯었다고 하나 강직함이 익히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6세기 전반 조선 화단에서 화가로서 어엿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비록 전해지는 작품이 몹시 드물어 그의 화풍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에는 한계가 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는 전래작이 희귀한 16세기 한국회화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화풍상 시대성이 선명할뿐만아니라, 동시대 조선이 일본에 끼친 영향 등 양국 회화교류의 측면에서도 거론되고있는 명품이라 할 수 있었다. 화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두드러진 이들 지식인 화가들 중에는 당쟁에 연루되어 사대부로서의 정치적 활동이 거세되었기에 서화로 평생을 보낸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양팽손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조선화단에서 크게 주목되는 문인화가인 양팽손을 문화인물로 선정함은 큰 의의가 있다하겠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의 그림들은 지금까지 전래되는 것이 몹시 드물다. 오늘날 양팽손의 유전 작은 전칭 작을 포함하여 10점 내외에 불과하나 장르상으로는 산수, 영모, 사군자, 기명절지 등에 걸쳐 있다.<@2왼쪽> ▶산수화부터 살피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는 화면 우상단에 학포가 지어 쓴 2수의 제시(題詩)가 적혀있는 것으로 일찍부터 알려진 그의 대표작인데, 일제시대 데라우치총독이 박물관에 기증한 그림이다. 이 밖에 문중에는 원화는 아니나 '학포선생 산수도'라는 제목이 화면상에 있는〈산수도판각〉이 전해지는데 화면구성 및 산세표현 나무처리기법 등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산수도〉와 친연성이 감지되는 작품으로 양팽손의 문집 발간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유현재(幽玄齋) 소장의 전술한 〈산수도〉와 매우 유사한 그림이 알려져 있고, 1996년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에서 개최된 조선회화특별전에 김익주(金翊胄)의 1720년 간기가 있는〈호렵도〉와〈산수도〉전칭 작이 출품되었다. ▶사군자로는 현재 문중이 소장한〈매죽도판각(梅竹圖板刻)〉이 있고, 원래는 8폭 병풍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4폭만 전해지는〈묵죽(墨竹)〉이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 고식(古式)을 지녀 주목된다. 노산 이은상의 언급에 따르면 이본호남가(異本湖南歌)의 실내묘사에 '학포의 묵죽'이란 대목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양팽손이 대나무를 그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묵죽의 경우 죽순이 등장한 봄, 바람에 휘날리는 세죽(細竹)과 굵은 줄기의 통죽(筒竹) 등 계절이 안배된 일괄품이다. 매폭에 화가이름을 알려주는 도장과 묵서의 작품명이 있는데 이는 후대의 것으로 사료된다. 매폭 예외 없이 새들이 등장하여. 조선중기에 문인화가들이 수묵으로 즐겨 그려 크게 유행한 사계영모도(四季翎毛圖) 계열, 그리고 15∼16세기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등장하는 대나무 및 새들과 친연성이 감지되는 그림들이다. ▶종가집에 소장된 기명절지도에 속한〈연지도(蓮芝圖)〉는 문중 후손이 1916년 서울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본가에서 옮겨온 그림이다. 양팽손의 외손인 이이장(李彛章,1708-1764)이 1761년에 쓴 제발이 첨부되어 있어 양팽손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이기도 하다. 다기(茶器)와 함께 각기 연꽃과 영지가 주된 소재가 된 2폭의 그림으로, 오늘날 이 소재의 그림은 윤두서에 이어 책가도(冊架圖) 계열의 조선말기 것들이 전래되는데 이 분야의 그림 중에서는 시대가 올라가는 점에서도 중시된다. 출처 : 역사 기록 및 백과사전 등에서 발췌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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