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은 백아산을 비롯해 모후산 등 험악한 산들이 많아 6.25당시 빨치산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양민들의 피해는 많았다. 이 사실을 자료에 의해 연재를 해본다<편집자> ●이서면 1950년 11월 10일 도석리에서 잔비들이 면사무소, 이서국민학교, 지서에 방화하였는데 지서만 전소되고 면사무소와 학교는 일부만 소각되었다. 동일 도석리에 거주하던 김내섭외 5명을 싸리골에서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1950년 11월 15일 이서지서는 당시 월산리에 위치하고 있을 때 공비들이 내습하였다. 당일 방석보(도석리)방향에서 몰려온 공비 200여명(추산)이 총성을 내면서 지서에 접근해 오자 지서장 박희연(38대출신)은 정문초소에 우재호, 유제두, 고기석, 양원식, 김영근을 후문초소에 공영출, 노장원, 강홍문, 한남수, 박병태를 배치하고 지서장외 6명은 이동사격조로 편성 사방을 응사하면서 간혹 수류탄을 투척함으로써 공비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나 물염마을에 거주하던 이동실과 면서기등 2명이 숨졌다. ● 북면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후 북면에도 좌익사상을 가진자가 있었으며 백아산을 중심으로 공비들이 출몰, 민가로부터 식량등을 약탈해 갔다. 1949년 10월 공비소탕을 목적으로 국군 15연대 3대대가 주둔하여 원리 주재소앞과 아산국민학교 교정에 면민을 집합시켜 입산자 가족을 색출하여 아산국민학교에서만 약50여명을 처형했다. 이후 북면의 외딴마을 10여곳을 소각시키고 주민들은 인근마을로 대피시켜 마을주변에 대나무나 소나무로 울타리를 막고 출입문에 보초를 세워 출입자를 통제하였다. 본면 학천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15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공비들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였다. 1950년 6.25이후 양민들은 국군주둔지로 피난하였는데 하다, 와천, 외애, 길성, 수리마을은 이서면 보산리 난산마을로(11중대 주둔), 옥리 , 서유, 맹리마을은 담양군 창평면 대덕, 고서면으로, 원리, 남치, 송단, 방리마을은 곡성군 오산면, 입면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체면민 2,000세대의 70%인 1,400여세대가 이동하였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주민은 공비를 따라 낮에는 산으로, 밤에는 마을로 이동하며 생명을 이어갔다. 1950년 11월~ 1951년 4월에 아군은 작전상 불리하다는 이유로 면사무소, 지서, 아산국민학교, 서국민학교 등 공공건물과 민가 약 4,000여동을 소각하였다. 1951년 봄 이서면 주둔 국군일부가 하다 앞산 고지와 와천 앞산 고지에 주둔하였다. 1952년 3월경 임시 면사무소를 와천리에 두고 면민구호와 행정사무만을 이어갔다. 1952년 6월경 경찰병력이 길성고지(군부등), 서유리(잿등)에 주둔하였다. 1952년 10월 ~1951년 4월까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밤에는 공비들이, 낮에는 아군이 주민들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쌍방에서 학살하였다(1,000여명 희생추정)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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