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아픈 6.25와 화순군(7)
동복면과 남면의 비극
입력시간 : 2010. 01.20. 00:00확대축소


6.25당시 처참했던 화순지방의 슬픈 사연을 수집해서 연재를 한다.

화순군은 백아산을 비롯해 모후산 등 험악한 산들이 많아 6.25당시 빨치산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양민들의 피해는 많았다. 이 사실을 자료에 의해 연재를 해본다<편집자>

● 동복면

1950년 8월 16일 당시 동복면 부면장 오연진이 광주형무소로 압송되었다가 화순읍 교리저수지에서 피살되었다. 1950년 10월 27일 잔비들에 의해서 면사무소, 지서, 소방서, 금융조합, 동복국민학교, 동복향교, 대성전 및 부속건물이 소실되었다. 공비들은 야간에 지서습격을 목표로 천변리 뒷등과 독상리, 한천리 냇가에서 부터 집중사격을 가해왔다. 지서에서는 경찰들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보고를 받은 화순경찰서기동대 김이두 소대가 도착하여 진압했으나 순경 이평규 외 20여명이 전사상을 입었다.

1951년 7월 21일에 야간에 공비들이 또 다시 내습, 교전하였는데 초소까지 접근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초소가 불타고 의경 1명이 전사, 순경 김명기가 전상을 입었다. 공비들은 소재지에서 농우2필을 끌고 가다 본서 정등만기동대의 추격을 받아 운월치에서 공비 10여명이 사살당하고 농우를 되찾아 돌려주었다.

● 남면

1950년 7월 20일 반란군이 사평국민학교를 점령 사용하던 중 10월 5일 퇴각과 동시에 사평국민학교 교사 및 관사, 학적부 등 서류일체를 소각했고 학교장 신태균과 부인을 학교 뒷산에서 잔인하게 학살했다.

1950년11월경 반란군은 유마사를 거점으로 모후산에서 활동하였는데 퇴각하면서 대웅전 등 불당4동을 소각시켰다. 1950년 11월경 모후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잔비들이 다산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밤마다 공산주의 교육을 하였는데 국군들 또한 입산자색출을 위하여 반란군으로 가장하고 이 마을에 들어가 공산주의를 선전, 주민의 동태를 파악하고자 유도한 결과 목숨을 부지하려고 호응한 주민 23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회관앞 광장에서 사살하여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0년 12월경 절산리, 사수리, 주산리, 남계리 등 6개마을은 동복을 거점으로 한 국군과 모후산을 은신처로 한 반란군이 주야로 활동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국군이 반란군을 소탕할 목적으로 절산1구 60호, 절산2구 50호, 사수1구 50호, 사수3구 30호, 주산리 50호, 남계1구 30호 등 마을의 가옥을 소각하였다.

6.25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모두 184명으로 남자가 125명, 여자가 59명으로 집계되었고 소실된 건물은 면사무소, 지서, 사평국민학교, 동국민학교, 농회창고, 유마사, 독취정, 영사재등이다. 가옥은 전체 465동이 소각되었다.

1950년 10월 29일 오후 유격대 군당지령에 의하여 제2블럭 공비(모후산은거)들이 지서를 향해 습격해 왔는데 당시 남면지서는 사평국민학교 뒷산고지에다 진지를 구축해 놓고 야간에는 그곳에서 경비를 했었다. 지서장 천재열외 25명은 고지를 포위한 공비들과 장시간 공방전을 벌였는데 지서병력으로는 수백명의 공비들을 막아 내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대원들은 지칠대로 지쳤고 부상을 당한 경찰이 늘어만 갔다. 이 때 본서 기동대 김만흥, 석상벽, 박영환등 2개 소대가 도착하자 공비들은 도망하였다.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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