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書經』 旅獒(여오)[원문] 完人喪德玩物喪志 [내용]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는 잔인한 성격의 군주로 권력을 가지고 민간의 재화나 진기(珍器)를 거두어들여 대궁전을 세우고 밤낮으로 유흥에 탐닉하고 있었다. 주(周)나라의 서백(西伯:서방 여러 민족의 우두머리) 창(昌)은 겉으로는 주(紂) 왕에게 복종하는 채 했으나, 내심으로는 은나라를 쓰러뜨릴 것을 생각하고 착착 실력을 쌓아 나갔다. 창이 죽고 발(發:후에 주나라의 무왕)이 뒤를 이었다. 기원전 1051년, 그는 은나라 타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황하를 건너 은나라의 수도로 진격했다. 이 보고를 받은 주(紂)는 서둘러 죄인을 석방하고 70만 대군을 편성해 주(周)나라의 군사를 목야(牧野)에서 맞아 치기로 했다. 그러나 계속 학대를 받아 온 죄수나 노예에게 주왕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은나라 군사는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주왕은 궁전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은 건국 공신과 제후를 각지에 봉함과 동시에 먼나라에도 사자를 보내어 자기의 문덕(文德)과 무공(武功)을 전하고 신하로서 복종할 것을 촉구했다. 하루는 서방 저 먼 곳에 있는 여(旅)나라의 사자가 와서 큰 개 한 마리를 헌상했다. 무왕은 기꺼이 이 진귀한 헌상품을 수령하고 사자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그걸 본 태보(太保) 소공(召公)이 글을 올려 무왕에게 간언했다. "사람을 가지고 놀면 덕을 상하고, 사물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습니다. (完人喪德玩物喪志 완인상덕 완물상지)" 그것을 읽은 무왕은 은나라가 멸망한 것을 교훈 삼아 그 개는 물론 헌상품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후와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완벽 完璧 [온전할 완/구슬 벽] ☞흠이 없는 구슬. 결점이 없이 훌륭함. [원] 完璧歸趙(완벽귀조--구슬을 온전히 가지고 조나라로 돌아오다) [유]화씨지벽和氏之璧/연성지벽連城之璧 [출전]『史記』藺相如傳 [내용] : 趙의 혜문왕(惠文王)은 세상에도 드문「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고귀한 구슬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신하 목현(木賢)의 애장품이었는데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강대국 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조에 사신을 보내어 15성(城)과 화씨지벽과 바꾸자고 청하였다. 혜문왕은 걱정이 생겼다. 내주자니 소양왕이 받고도 15성의 약속을 모르는 척할지도 모르고, 거절하자니 이를 구실삼아 진이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왕은 중신 회의를 열었다. 이 때, 목현이 나와서 식객 중 인상여라는 자가 지모와 용기가 있으니 그를 사자로 보내면 능히 난국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 하고 천거하였다. 인상여(藺相如)는 즉시 진으로 가 지니고 갔던 화씨지벽을 일단 소왕에게 바쳤다. 구슬을 받아 쥔 왕은 "과연 훌륭하구나!" 하면서 감탄하면서 좋아할 뿐 15성 이야기는 조금도 비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예기했던 인상여는,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고 속여 말하니 무심코 내주었다. 인상여는 즉시,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하였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불연이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하고는 구슬을 빼내어 조국에 돌려보냈다. 호담한 소양왕은 할 수 없이 인상여를 정중하게 놓아 보냈다. [원문]王曰: 誰可使者? 相如曰: 王必無人, 臣願奉璧往使. 城入趙而璧留<秦>;城不入, 臣請完璧歸趙. 趙王於是遂遣<相如>奉璧西入秦. [참고]和氏之璧[和:화할 화/ 氏:각시 씨/之:갈 지/ 璧:둥근 옥 벽.]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봉황이 돌 위에 깃들이는 걸 보고 그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월형( 刑: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끌어안고 초산 기슭에서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문왕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었다. "세상에 발 뒤꿈치를 잘리는 형을 받은 사람은 적지 않다. 그대만이 그처럼 슬퍼하며 통곡하는 이유가 뭔가?" 그러자 화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발뒤꿈치가 잘렸다고 운 건 아닙니다. 천하의 보옥인데도 돌덩이로 단정하고 그것을 바친 정직한 저를 사기꾼으로 몬 것이 슬퍼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문왕은 즉시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和氏之璧'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화씨지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갔던 인상여(藺相如)가 천하의 보옥을 그냥 뺏길뻔 한 것을 기지(機智)로 흠집 하나 없이 온전히 가지고 돌아왔다고 해서 완벽(完璧)이라는 성어가 생겨났다. 진(秦) 26년 초(楚)를 멸망시키고 이 옥을 얻은 시황제(始皇帝)는 옥공(玉工)으로 하여금 도장을 깎게 하고 재상 이사(李斯)에게 여덟 자를 전서(篆書)로 쓰게 해서 처음 옥새로 사용하게 되었다. 受命於天(수명어천) 명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旣壽永昌(기수영창) 오래 가고 크게 뻗으리라 ※일종의 야광주(夜光珠) 화씨벽이 그토록 유명했던 것은 구슬이 있는 백보 안에는 파리와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고 여름엔 부채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제공 : 사이버백과 (http://cybergosa.net) (다음에 계속)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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