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석 칼럼>역사만큼 행복 준 한국축구
입력시간 : 2010. 07.17. 00:00확대축소


기원전 2세기경의 중국과 로마제국. 그리고 중세 프랑스와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서 오늘날 축구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가 열렸다. 그러나 축구의 모국은 영국이다. 1863년 10월 26일 영국축구협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에 처음 축구를 전파한 사람들은 19세기 말 영국 군함 승무원들이다. 이후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축구 보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02년 배재학당에 축구부가 생긴 뒤 1903년 한성기독교청년회, 1906년 대한체육구락부 등에 잇따라 축구단이 조직됐다. 국내 축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들어서다. 1920년대 신문 스포츠난에는 중앙학교 대 동명고, 평양단 대 숭실학교, 대구 계성학교 대 마산 창신학교 등이 펼친 ' 풋뽈' 경기소식이 매달 3~10건 실렸다.

1920년 7월 고원훈 등 70여 명의 발기로 조선체육회가 조직됐다. 며칠 뒤 조선체육회 주선, 조선청년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도쿄 한국유학생회축구단의 모국방문 경기가 열렸다. '휘문과 배재교에서 축구' 5대0으로 도쿄군, 청년회에게 대패… 축구전만은 운동계의 모범' 등 기사가 5일간 이어졌다.

1921년 한국 최초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에는 배재, 경신, 보성, 휘문 등 사립학교팀과 건강구락부, 불교청년회 같은 클럽팀이 참가했다. 이대회는 1933년까지 계속됐다. 1922년 11월 26일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결승전 풍경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용감스런 운동군의 기개라. 어찌 여간 오는 눈을 두려워하리오. 오전 9시 정각부터 운동장에 모히어 선수일동과 응원단이 일제히 눈을 치우는것도 한 장관을 이루었다." 1926년 4월 일본 오사카구락부가 한국을 방문했고 10월에는 조선대표 격인 조선축구단이 해외원정에 나섰다.

조선축구단은 도쿄에서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 등과 겨뤄 8전5승3무로 무패 기록을 달성했다. 1928년 2월 3일자에는 조선축구단 김원태 주장이 '상하이 원정기'를 실었다. 1926년 조선전문학교축구연맹(현 대학연맹)이 발족해 경성제대, 연희전문, 보성전문, 수원고등농림학교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8년 대한축구협회(KFA)의 모체인 조선심판협회가 조직됐고 1929년에는 축구경평전(경성대 평양)이 시작됐다.

1938년 일제는 조선체육회를 해체했다. 이어 1942년에는 조선체육진흥회를 세워 조선축구협회를 흡수하려했다. 그러나 조선축구협회는 이에 불복하고 서울 반도호텔에서 자체 해산했다. 광복 후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해 헝가리에 0대9, 터키에 0대7로 대패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뒤 한국 축구는 기적을 이뤄냈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한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강팀을 무찌르고 4강에 진출했다. 2009년 10월 열린청소년(U-20) 월드컵에서도 한국은 8강 진출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한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2대0으로 그리스를 이기고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아르헨티나전에선 비록 4대1로 패배했지만, 한국 대표팀이 지난 26일 우루과이에 1대2로 분패하면서 남아공월드컵을 마무리했다. 비록 한국은 8강 진출이 좌절됐지만 사상 첫 원정16강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경기가 끝난 뒤 내리는 빗줄기보다 더 굵게 보인 태극전사들의 눈물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고개숙인 채 귀국한 선수들에게 꼭 이말을 전해주고 싶다. 스페인처럼 우승은 못했지만 "태극전사여, 당신들 덕분에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운석 <시인. 무진주문화마당 회장>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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