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선 칼럼> 문화재와 친해지기,
사찰아 놀아보자
입력시간 : 2011. 01.19. 00:00확대축소


문화재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온갖 상징의 옷을 입고 있다. 우리 광주와 전남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광주에 189개, 전남에 1165 개의 지정된 문화재만 보아도 우리 지역이 문화촌임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문화재 모두는 원생성 관광자원이 되는데 손색이 없으므로 줄잡아 우리 지역 관광지는 문화재만을 중심으로 한다 해도 천여 군데가 넘으니 이게 어디 적은 숫자인가? 항차 지정되지 아니한 산수며 갯벌, 인물, 누정, 숲, 등은 또 어떤가? 실로 깜짝 놀랄 일이다.

문제는 이들이 입고 있는 상징의 옷(가면)을 벗겨 맨 얼굴을 보는 일이다. 문화재가 갖고 있는 페르조나(persona)의 가면을 벗겨 젤르(seele)의 진면목을 보는 안목, 우리는 그것을 실력이라 한다.

상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성과 신성성, 함축성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고 있다. 오늘은 사찰이 또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가? 알아보자. 왜 사찰을 지었으며 왜 그리 요란하게 장엄을 하였을까? 석가모니 당시에는 사찰 건립을 금했다는데 그의 사후 왜 많은 사찰이 지어졌으며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고 대문은 어찌 그리 많으며 부처는 또 뭐 그리 여럿인 지….

한마디로 그것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인 것이다. 석가모니 사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임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장소가 없질 않은가, 하여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실용적 수요에서 사찰은 건립되었다. 그렇다면 화려한 치장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현실에 대한 불만과 회의에서 기인한다.

저 아름다운 피안의 세계는 바로 현실의 불만과 고통에서 생겨난다. 그렇다면 고해(苦海)요, 업보(業報)로 응징당하고 있는 현실과 대조적인 곳, 저 피안의 극락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중생에게 보여주고자 만든 것이 바로 대웅전 안에 있는 닷집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석가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듯, 불경을 읽든 참선을 하든 열심히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공, 이 또한 수요자를 위한 공급의 원칙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뿐만 아니라 주요 법당 곧 대웅전 등은 하나의 배로써 상징되는데 이른바 반야용선(般若龍船)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절에 와서 그 법당에 온 중생들은 저 피안으로 가는 반야용선을 탈 수 있으며 거기에 몸만 실으면 고해를 건너 극락으로 간다는 논리가 통하도록 전각 앞이나 옆 등에 용머리를 만들거나 새겨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반야용선이 정박하고 있는 부두 곧 대웅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무슨 산에 있는 무슨 절이라는 그 절의 문패가 걸린 일주문을 들어선 뒤, 그 절을 지키는 네 명의 천왕이 있는 천왕문을 맞이한다.

이어 깨달음과 그렇지 못함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속세와 성역이 다르지 않다는 해탈문(불이문)을 통과하는 등 일종의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까 일주문에서부터 대웅전까지는 중생이 구원받기까지의 과정과 절차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떤 사찰에는 천왕문과 해탈문 사이에 인왕문이 있기도 하며 해남 대흥사와 같이 아예 천왕문이 없는 사찰도 있으니 그 것은 풍수사상에 의한 지형상의 이유 등 여러 이유에서 그러할 수 있다.

이때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상의 배치 또한 사찰마다 조금씩 그에 맞는 법을 따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사찰에 들어서면 본전(주로 대웅전)의 건물이 작거나 높이가 낮으면 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거나 진입로가 곡선이기 일쑤인데 그것은 본전의 격을 높이려는 의도의 반영이다. 그러면서도 본전의 건축 양식은 주로 뒷산의 모습을 닮고 있으며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선 등을 맞댄 맞배지붕이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보다 더 많다.

사찰에는 불전 사물(四物)이라 하여 지하에 있는 중생을 위한 범종, 수중의 생물을 위한 목어, 공중을 나는 것들을 위한 운판 그리고 축생을 위한 쇠북 등이 하모니를 이루며 예불을 집행한다. 이렇듯 사찰은 실용적 목적과 함께 상징이라는 옷을 입었거나 가면을 쓰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맨얼굴을 보기 위해 심도 있는 노력을 한다면 문화재는 우리에게 훨씬 가깝게 다가와 고유한 향기를 발할 것이다.

최한선 <전남도립대 교수ㆍ전남문화재연구원장>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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