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열 수필 -사라져가는 고향
입력시간 : 2011. 06.13. 00:00확대축소


무등산(無等山)하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연구실임에도,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주위 산(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원인은 다름 아닌 도심 재개발로 20층을 훌쩍 넘는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에 피곤해진 눈을 들어 먼 산의 푸르름을 음미하는 재미 또한 결코 소소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연구실 바로 지척의 아카시아 숲에서 들려오는 매미울음 소리는 그 어느 유명한 성악가의 노랫소리보다도 나에게는 포근하고 달콤하게 다가온다.

어디 그뿐인가, 맑은 날 창문 앞에 서면, 내가 어릴 때 뛰놀았던 고향의 산천 모습까지도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와 나를 50여년 전의 동심(童心)으로 끌어 들이기도 하니 내가 일년 365일을 연구실에 박혀 지내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고향은 광주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장성군 남면이다. 지금이야 교통편이 좋아져 지척이나 다름없이 되었지만, 어릴 적에는 상당히 궁벽한 외딴 곳에 해당되어,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던 곳이었다.

할머니께서 애써 모은 달걀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험한 산길을 넘어 장성읍내의 황룡장(黃龍場)이나 임곡장(林谷場)에 가시면 석양녁에야 집에 돌아오시곤 하였으니 아마도 30리(里)는 족히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무렵 동네에서 비교적 밥술이나 먹는 집안의 자제들만이 고개 넘어 임곡중학교에 진학하곤 하였는데, 눈 내리는 겨울에는 마치 토끼몰이에 나선 사냥꾼처럼 새끼로 운동화를 꽁꽁 묶고 고개를 넘곤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출향하여 지금껏 객지에서 살아왔고 고향에 가까운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 어찌 생각하면 태자리란 것 외에는 고향과의 연고가 짙게 깔려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결코 고향을 잊지 못한다. 잊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회만 있으면 고향으로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쓴다.

하물며 아내의 경우는 남편의 고향이라는 사실 이외에 아무런 연고도, 추억도 없으니 그곳에 아무런 흥미도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아내를 재촉하여 때때로 고향을 찾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아내의 눈초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그래 정년하면 고향으로 가야지’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뇌리 속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그마한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땅은 텃밭을 포함하여 300여 평이면 될 것 같고 등등… 나름대로 재정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날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아내를 설득하여 다시 고향으로 핸들을 돌리게 하였다. 자꾸 가다보면 정(情)이 들고 마음이 바뀌어져서 아내의 시큰둥한 태도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그런데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나의 시야에 동네 앞 선창부락 저수지 뒤로 예전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 들어왔다. 새로운 길이 보이는가 하면 그 위를 커다란 덤프트럭이 오가는 것이었다.

더욱이 덤프트럭 위에는 비오는 날 등굣길에 진저리나게도 고무신에 달라붙어 나를 괴롭혔던 검붉은 황토가 남산만 하게 실려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망연자실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책 보따리 들쳐 메고 뛰어 다녔던 동네 앞 안산(案山)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날 선글라스를 짙게 쓴 정치군인이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일으켜 모든 국민들에게 재건국민운동을 강요할 때 우리 초등학생들도 골목 청소한다고 해가 뜨기 바쁘게 빗자루를 들쳐 메고 모였던 곳이 바로 안산 아니었던가,

그 안산이 불도저의 위력 앞에 그 검붉은 내장을 드러낸 채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동네 사람을 만나 그 연유를 물은 즉, 장성에서 임곡까지의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요즈음 이른바 물류비용의 절감을 위한다는 구실로, 그리고 SOC 확장만이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전국의 산하(山河)가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삶의 질을 높여가기 위해서는 도로가 좋아져야 할 터이니 어찌 그것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가급적 지켜나가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책무가 아닐까. 5․16이 일어난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지금에도 그때의 ‘개발 제일주의’가 여기저기 고향의 산천을 파괴하고 있는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떠나오지 않을 수 없었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내내 파헤쳐져 가고 있는 안산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람스러운 바위와 함께 아람들이 소나무로 절경을 이루던 동네 앞 안산이 신음하는 광경과 함께 고향을 그리는 내 마음 또한 서서히 식어가고 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오수열 <조선대 사회과학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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