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간의 사랑에는 브레이크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구나 그 위험과 열정을 알기에 주저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이 멈출 수 없다고 한다. 이성간의 사랑이 이러하다면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식 사랑에는 ‘현명함’이라는 브레이크가 단연코 필요하다. 언젠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글이 실렸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외동아들로 구성된 단란한 한 가정이 있었다. 아이는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씩씩하게 컸다. 그러나 이 아이는 철이 없고, 천방지축이어서 부모님들의 말씀을 가볍게 여겨 귓전으로 흘려버리곤 하였다. 아빠는 이렇게 아이를 키워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아빠는 아이와 한 가지 약속을 하였다. 만일 약속을 어기면 따뜻한 아이의 방이 아닌 어두울 다락방에서 잠을 재우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러나 며칠이 채 지나기 전에 아들은 그 약속을 또 어기게 되었고, 아빠는 처음 다짐대로 아이를 다락방에서 자게 하였다. 울며 매달리는 아이를 아빠는 불호령과 함께 다락방으로 올려보냈다. 그 날 밤 아이의 부모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신들의 아이가 어두운 공간에서 추위와 두려움에 떨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의 엄마는 무정한 아빠를 탓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이를 용서하자고 했다. 아빠는 침묵했다. 한참 후에 아빠는 당신의 이불을 챙겨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약속을 어기긴 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어둠과 추위에 떨 때,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며 다락방에서 내려오게 했다면? 소중한 내 자식인데, 형체도 없는 약속하나가 무어 그리 대단할까? 그러면서 말한다. 자신은 진정 사랑이라는 큰마음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고. 고학력의 이 시대에 부모들의 맹목적인 교육열은 뉴스에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되기도 한다. 왜 그렇게 교육에 관심이 많은가? 소위 ‘치맛바랑’이라는 우리 나라 만의 유행어는 왜 생겼을까? 우리 민족 특유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방식을 시상이라도 할라치면 그 으뜸자리는 자녀교육이 차지할 것이 확실하다. 교육학자에 따라 그 정의는 차이가 있겠으나, 어느 학자를 막론하고 교육을 완성하는 주요 핵심이 ‘사랑’임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학습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가정은 최초이자 중요한 인간교육의 장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녀교육에 대한 올바른 역할과 사랑을 현명하게 구별지어 행동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될까? 자식의 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행위를 해도, 동중도덕을 지키지 않아도 관대하게 봐주거나 그냥 지나치는 부모들, 그들의 자녀들은 결국 어린 시절부터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익히지 못하고, 그에 대한 판단력 또한 발달하지 못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방임적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의 지나친 자녀 위주의 생활양식도 문제이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을 키워낼 개연성이 짙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학습한 바와 유사한 인간이 된다. 애타적 합리적인 사랑을 받으면 인간성이 돋보이는 합리적인 인간이, 과잉의 방임적인 교육을 받으면 그런 유형의 인간이 되기 쉽다. 페스탈로치(J. H. Pestalozzi)는 “가정은 도덕성의 학교이며, 어머니는 하늘이 내리신 교사이다”라 말했다. 온전한 사랑에는 관심도 없고, 타인을 이해하려고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만드는 ‘공동체 삶’을 생각해봤나요? 이정재 <광주교육대학교 前 총장 >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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