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輯] 화순군민의 과거사 피해사례 연재(完)
군경의 화순 민간인 학살 사건...현재 피해 신청자 700여 건....계속 신청 접수 중...
[화순군 사회복지과] "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한 진실 규명 접수 중...많은 신청 요망"
신청기간 2020. 12월10~2023. 12.09 .(061-379-3263)많은 신청으로 민간단체 구성 필요
입력시간 : 2021. 09.10. 00:00확대축소


▶사진 비극의 백아산에 구름다리를 조성 원혼들을 달랜다.
화순군은 일제 강점기 또는 그 직전에 벌어진 항일운동 등에 관한 사건 시행일에 의해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신장시키는 등의 해외동포사 등에 의한 피해사건(법률 제7542호),

1945년 8월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 사망, 상해, 실종 사건 등(법제 2조제1항)에 대한 피해자의 신청을 받고 있다.

신청자격은 희생자, 피해자, 또는 그 유족 및 친족 관계에 있는 자들이며, 접수처는 화순군 사회복지과(061-379-3263)에 직접 방문 또는 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본 파인뉴스에서는 이러한 피해자의 사실들의 자료를 그 동안 수집해 피해 사례들을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 註]

이 자료를 인용한 이유는 화순의 비극을 군민 누군가가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했던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을 인용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필자(정찬대 기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 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다. 제주 4.3, 여순 사건에 이어 화순의 피해도 조명해야 한다.[파인뉴스 주장]

◈암울한 현대사의 비극, 좌-우에 선 형제

1951년 3월17일(음력 2월10일), 도암면 수색 작전에 나선 국군 제20연대 3대대는 해망산(해발 359미터)을 넘어 도암면 도장 마을(도장리)에 도착했다. 산을 넘기 전 도곡면을 지나오면서 이미 수십 명의 민간인들 심장에 총구를 겨눈 만큼 이들의 토벌작전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른 새벽, 마을 한가운데 포탄을 떨어뜨린 3대대는 아비규환 속에 사람들을 마을 어귀로 끌어냈다. 김민동(당시 44세) 씨와 김연순(당시 34세) 씨는 군인들 지시에 늑장을 부렸다며 그 즉시 사살됐다.

도곡에서 작전 중이던 3대대는 전날 빨치산 간부들이 이곳 도장 마을에 모여 회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둘러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군 동향을 사전에 파악한 빨치산들은 마을을 떠나 이미 화학산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군인들은 마을 위쪽 해망산 기슭 도포배미 언덕으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말없이 군인 지시에 따른 주민들은 아직 어둑한 상황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울먹인 어린아이, 아기를 업은 새댁, 핫바지 차림의 문 씨, 다리가 불편한 김 노인까지, 표정 곳곳에는 공포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군 간부 중 한 명이 도포배미에 오른 주민을 향해 소리쳤다.

"군이나 경찰 가족이 있는 사람은 이쪽으로 서라."

이내 주민들은 갈리기 시작했다. 당시 13살이던 김범순 씨도 서둘러 자리를 이동했다. 경찰이던 그의 큰형님(김학순·25세)은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진압 도중 14연대 반란군에 의해 순직했다.

1월26일 도포배미 언덕 한 부분에 선 김 씨는 취재진을 향해 "이 자리야, 이 자리"라며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그는 "중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경찰이나 군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 모이라고 따로 불러냈어, 그래서 우린 살았지"라며 다소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취재진은 김 씨로부터 얄궂은 사연 하나를 듣게 됐다. 바로 자신의 둘째형 김보순 씨 얘기였다. 그는 큰형과 달리 전쟁 도중 좌의 편에 섰다. 1950년 인민군 점령 시기 의용군으로 징집된 둘째형(당시 22세)은 빨치산으로 활동 중 평양까지 올라가 국군과 치열하게 맞섰다. 이후 포로로 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석방조치에 따라 마산으로 후송된 뒤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왔다. 피를 나눈 두 형제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각각 상대 진영에 총구를 겨눠야만 했다. 좌와 우로 나뉜 암울한 현대사가 가져온 또 다른 비극이었다.

◈"뭣 땜시 우릴 죽인다요"…도장 마을 나순례 씨의 용기

군인들은 100여 명 이상 모인 도포배미 앞 논에서 군경 가족을 제외한 아이들과 노인, 여성 그리고 청장년 남성을 따로 분류해 줄을 세웠다. 그 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민들도 금세 직감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논 바로 위 언덕에 기관총을 거치한 군인들은 남성 쪽을 바라보며 총구를 낮춘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노란 불꽃을 뿜은 화기는 주민들을 거침없이 집어삼켰고, 사지를 뚫고 나온 총탄과 핏빛으로 논바닥은 붉게 뜯겼다.

20여 명의 남성은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쓰러졌고, 그 옆에 비켜있던 여성들의 통곡 소리에 도포배미는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 편에 있던 군경 가족들도 일제히 얼굴을 돌리며 끔찍한 현장에서 눈을 피했다. 모든 게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범순 씨는 "거총시켜서 그대로 난사했다. 정말 비참하게 죽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좌익에 활동한 사람들은 다 나오라고 했는데, 없으니깐 아무도 안 나갔고, 그래서 다 죽인 것"이라며 분노했다. 그러면서 "전쟁은 정말 없어야 한다"며 치를 떨었다.

도장 마을에서 만난 김잠귀(70세) 씨 부친도 이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총격이 가해지기 직전 재빨리 여자들 쪽으로 몸을 숨겨 총탄을 피할 수 있었다. 김 씨는 "체격이 크지 않았던 아버지께선 얼른 줄을 바꿔 살아남았다. 여자 쪽은 아마도 살 것 같다는 판단을 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청장년층을 사살한 기관총의 총구는 어느새 여성 쪽을 향했다. 그때였다. 3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은 나순례(당시 29세) 씨가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총부리를 틀어잡았다. 방금 전 난사로 총열은 뜨거웠지만, 나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군인들을 보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뭣 땜시 우리를 죽인다요.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제발 살려주시오."

공포감에 떤 채 아무 말 없던 몇몇 주민과 아이들이 하나둘 흐느끼기 시작했다. 냉혈한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그 모습에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의 학살은 멈췄고, 군인들은 널브러진 싸늘한 시체를 방치한 채 급히 철수했다. 하지만 10살 어린아이를 포함해 마을 주민 20여 명이 목숨을 잃은 후였다.

주민들은 군인 지시에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거적으로 대충 덮어두고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이후 마을을 다시 찾은 주민들은 시신을 대발쌈(대나무로 이엄을 엮은 관)에 넣어 땅에 묻고 통곡의 장례를 치렀다.

(정찬대)취재진은 당시 나 씨 등에 업혀있던 아이를 만났다. 3살 어린아이는 어느새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도장마을에 여전히 터를 이루고 있는 형시문(67세) 씨는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아마도 어린 나를 업고 있어 그런 용기가 나왔던 게 아닌가 싶다"며 "자식을 둔 어머니니까 가능했다"고 말했다.

나 씨는 이미 10여 년 전 고인이 됐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날의 얘기를 꺼내는 것을 꺼려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대단한 용기를 보인 나순례 씨에게도 당시의 기억은 치 떨리는 공포였고, 가슴 메이는 상처였다. 형 씨는 "어머니로부터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 그때 일을 물어보면 화를 내시곤 했다"고 털어놨다. 나 씨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이날의 학살은 멈췄고, 100여 명 이상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현재 도장 마을 주민들은 학살이 있던 음력 2월10일 합동위령제를 모시고 있다. 또 나순례 씨 공적비 건립도 논의 중에 있다. 한 주민은 "동네사람 모두 그 분에게 감사드리고 있다"며 "절대 잊을 수 없는 은혜"라고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인용편집 파인뉴스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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