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머슴(담살이)이었던 안규홍 의병장 모습. ▲머슴(담살이)이었던 안규홍 의병장 모습.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한센인들이 걸었던 '눈물의 길'을 따라 두 번째 걷기에 나선 지난주 금요일(3.28) 출발 지점은 전남 벌교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6년 소록도 나환자수용소가 설립되면서 소록도를 찾는 환자들 대부분이 벌교역에서 내려 고흥 소록도까지 걸었기 때문이다. 소록도에 계시는 환자나 치유된 분 대부분이 80세가 넘은 지금, 벌교에서 그분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벌교역 인근 공원에 세워진 동상과 '태백산맥 문학거리'가 내 눈길을 끌었다. '벌교'를 대표하는 두 가지는 '꼬막'과 '주먹' 이야기다. 꼬막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이야기에 대한 출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공원 게시판에 기록돼 있던 내용이다. "마침 장터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다가 보니께, 일본 헌병들이 조선사람 장사꾼들을 발로 걷어차고, 짐짝들을 막 집어던져 불면서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모양이여… 이걸 보고 못참은 안 대장이 지겟짐을 떡 받쳐놓고 쫒아 와서 그대로 주먹으로 대그빡 할 것 없이 몇 대 쳐분께, 그냥 쫙 뻗어불드라여…" 게시판에 등장하는 안대장이란 보성출신 의병장 안규홍(1879~1910)을 일컫는다. 안규홍은 보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가계가 궁핍하여 어린 나이에 머슴이 되었다. 소년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담살이', 즉 꼬마 머슴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07년 담살이 동지들을 규합해 강성인이 이끄는 의병단과 합세해 보성 동소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때문에 그가 이끄는 의병단을 '담살이 의병'이라고 불렀다. 1908년 4월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1909년 9월까지 파청, 진산, 원봉 전투 등에서 대원 450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뒀다. 1909년 9월 25일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이듬해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안규홍 의병장 동상을 쳐다보다가 요즈음 세태가 생각나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가난해 남의 집 머슴살이 하느라 글도 제대로 못 읽었다는 '담살이 의병장'은 국가와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해 목숨 걸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런데 요즈음 많이 배웠다는 최고 명문대 출신의 법꾸라지들은 호의호식하며 대한민국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안규홍 의병장이 살아계셨다면 주먹 한방 날리지 않을까? 안규홍 동상 인근에는 을사오적의 매국 대신을 저격한 죄로 귀양살이를 당한 후 제석산에서 수도에 전념한 '나철(1863~1916)'의 부조가 세워져 있었다. "나를 대한제국의 대표로 회담에 참석케 해 주시오"라고 탄원한 그는 1909년 대종교를 세우고 무장항쟁 지도자 배출과 교육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다. 대종교가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나철의 독립 외교활동과 오적 처단, 대종교 창건, 대한독립선언과 청산리대첩 등이다. 나철의 부조 옆에는 <고향><동백꽃><그리워>등을 작곡한 채동선의 부조가 세워져 있었다. 벌교 읍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벌교 일원에 막걸리를 공급해 오던 '술도가'가 있다. 도가집은 소설 <태백산맥> 도입부에 등장하는 정하섭의 본가이며 하섭과 소화 간의 애절한 인연의 배경이다. 소설에서 지식인 청년 정하섭과 지역유지인 아버지 정현동 사이의 갈등은 해방정국 당시 벌교에서 벌어졌던 이념갈등의 전형적인 예로 묘사되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태백산맥> 속에서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보성여관'이 있다. 아직도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 여관은 일제강점기 가장 번화한 중심가에 위치하였으며 당시에는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 모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원조꼬막정식' 식당에서 꼬막정식을 주문하자 주인은 "1인분은 안 된다"라고 한다. 하는 수 없어 국밥을 사 먹기 위해 전통시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알고 보니 벌교 장날이었다. 자그마한 시골 전통시장이지만 없는 게 없었다. 주꾸미를 사려고 흥정하는 사람들 옆에 서서 보니 엄청 비싸다. 이유를 물으니 "요즈음 도통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목화식당'에 들러 해장국을 마시며 잡담하는 손님들 옆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던 중 주인아주머니 얘기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딸이 손주 데리고 여수아쿠아리움 구경 갔다가 집에 와서 잔다고 하니 얼른 집에 가서 방에 보일러 틀어놔야 겄네. 요새는 자식들이 상전이어라우." 맞는 얘기다. 나이 든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손주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 " 20~30년 전만 해도 나이 들면 자식들한테 의지했지만 지금 세태는 자식들한테 의지하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막걸리를 마시며 잡담하는 세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주문했던 백반상이 나왔다. 그런데 반찬이 13가지나 됐다. 소고기 장조림, 간잽이회, 파무침, 미역국, 주꾸미, 달걀말이, 낙지젓갈, 양태, 파김치, 열무김치, 취나물, 배추김치, 호박무침. 시원한 미역국에는 소고기와 생새우도 들어있었다.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가격을 묻자 1만 원이란다. "아주머니, 이렇게 반찬이 골고루 나오는 데 남는 게 있어요?" 하고 묻자 빙그레 웃기만 하신다. 식사 후 믹스커피를 마시고 시장통으로 나와서 간판을 보니 정육점을 겸하고 있었다. 아하! 그래서 소고기 장조림에다가 미역국에 소고기가 들어있었구나. 푸짐한 벌교 음식 인심을 생각하다가 새벽잠을 깨운 닭 우는 소리가 생각났다. 벌교에는 내 어릴 적 시골 인심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파인뉴스 기자 470choi@daum.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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