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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철송 시인, 국민대 초빙교수

나는 서울에 산다. 1997년에 이주했으니 28년째 사는 셈이다. 서울 태생이거나, 여타의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인들은 나의 말투를 들으면 바로 나의 태생지를 안다. 서울의 지인들에게 나의 말투는 완벽한 전라도 억양인 것이다. 반면에 고향에 가면 거기 사람들은 내가 서울 사람 다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느끼하게 서울말’을 쓴다는 것이다.

이 두 반응을 보면 내 말투는 전라도 말도 서울말도 아닌 어정쩡한 그 무엇이다. 그러나 나는 말투에서 내 정체성을 고민한 적은 없다. 나는 그냥 전라도에서 태어나 30여 년 넘게 산 ‘나주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지 서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서울말이 내 말에 약간 ‘침투’해 들어온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싫어했다. 과거형으로 쓰는 것은 내가 지금도 전라도 사투리를 싫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명확하게 판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다 쓰고 난 후 내가 전라도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다행이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부터였던 듯하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읽으며 윤직원 영감의 그 전라도 어투가 뭔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내 말투가 저 영감과 같다니, 어린 시절에 그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윤직원 영감의 말투는 전라북도의 것이다. 나주 사람인 내 어투와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이 다르다.(영화 ‘자산어보’에서 ‘나주 사람’으로 나오는 정의성 배우의 말투를 들으며 내 조부, 부친, 삼촌들의 말을 듣는 듯 뭔가 친근함을 느꼈다.)

최근에 우연찮게 오윤의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며 왜 내가 전라도에 살면서도 전라도 사투리를 싫어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나의 성격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내 ‘영역’을 무단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고, 지금도 그렇다. 내 영역은 내가 좋아하거나, 허락한 사람들로만 채워져야지, 어느 날 익숙지 않은, 앞으로도 전혀 익숙지 않을 것이 분명한 어떤 이가 불쑥 들어오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아주 싫어한다.

그런데 전라도 사람들이, 혹은 전라도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그런 생각을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니까 내가 싫어하는 것은 전라도 말이 아니라,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즉 내 ‘영역’을 허락 없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침투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내가 전라도에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30대 중반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내 영역을 침범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내 부모를 포함한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이었고, 전라도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전라도 말을 싫어한 것도, 전라도 사람을 싫어한 것도 아닌 것이다. 단지 내 영역을 무단으로 들어서려고 했던 사람들을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내 태생으로 인해, 전라도 말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뿐이다. 거기에 윤직원 영감까지 한몫한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의 저자나 내 친구가 겪은 ‘전라도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저자와 나의 친구는 단지 그들의 부모가 전라도 사람인 것이지 그들은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는 ‘서울 사람’들이다. 다만 다른 이들이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이 그들과 내가 구별되는 지점이다.

나는 그들과 다르게 전라도에서 태어나 교육받았고, 삼십 대 중반까지 살았다. 그리고 여전히 전라도 말투를 고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영원히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내 정체성은 전라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친구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울에 살며, 실제로 혹은 ‘온라인’에서 전라도 사람들을 욕하거나 비하하는 말들을 이따금씩 보거나 듣는다. 그러나 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 ‘정상적인 사람’이겠는가. 느닷없이 “나도 호남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자가 어디 정상적인 사람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