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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비와 바람까지 적어 ‘무더위와의 전쟁’에 전국이 시달렸다. 이렇다보니 집에서 가마솥 더위를 이겨내기란 어지간한 인내심을 갖지 않고서는 어려웠다. 이럴때는 서민들에게 더위를 식혀줄 가전제품이 꼭 필요했다.

그게 바로 선풍기. 에어컨은 하루종일 틀고 지내기에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데 반해 이 방 저 방 옮겨다닐 수 있는 편리함 때문에 주로 선풍기를 애용했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여름철엔 선풍기가 에너지 절약 운동에도 한몫한다.

에어컨 한 대를 가동하는데 드는 전기가 선풍기 30대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과 거의 같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한데 서민들이 즐겨 애용하는 선풍기가 최근 한 달 새 3건의 사고를 쳤다. 8월 31일 오후 광주 북구 용두동에 사는 20대 청년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잠을 자다 숨진 채 발견됐다.

그 청년이 잠자던 방안에는 선풍기가 켜져 있었다는 점을 들어 경찰은 선풍기 사고로 추정했다. 또 이와 비슷한 사고가 2건이 더 발생하는 바람에 한여름 밀폐된 방에서 밤새 선풍기를 틀고 자면 사망한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선풍기가 괴소문까지 양신한 ‘한밤의 살인자’가 된 것은 열대야 때문이다. 우리나라 열대야 일수는 1900년대 초반에 비해 최근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서울의 경우 1910년대는 연평균 1~2일 정도 열대야가 나타났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6일 이상으로 늘었다. 그러나 최저 기온만으로 따지는 열대야 통계는 허점이 많다. 잠자리에 드는 저녁 시간에 발생해서 한밤중까지 계속되다가 새벽에 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지면 열대야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대야로 인한 선풍기 사고로 사망한 세 사람 모두 힘겹게 사는 서민들이라는 점에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데 추석이 지나고 추분이 어제인데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영국에서는 14세기까지만 해도 한 해를 여름, 겨울 두 철로 나누었는데, 우리나라가 닮은 판이다.

봄(Spring)이란 말은 16세기부터, 가을(Autumn)이란 말은 14세기의 시인인 초서가 처음 쓰고 있다.

계절을 나타내는 가을이란 말이 없었기에 겨울 속에 꼬리를 끄는 여름, 곧 늦더위나 잔서(殘署)를 나타내는 말이 많다. ‘작은 여름’, ‘주저하는 여름’, ‘노처(老妻))의 여름’ 등등…. 미국에서는 가을 더위나 초겨울 더위를 인디언 섬머라고 한다.

인디언이 꼭 이런 날씨를 골라 쳐들어왔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인디언처럼 변덕이 심해서 얻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노처의 여름’에서 발상된 것인지 잔서를 ‘늙은 장모의 여름’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장모 이미지가 대체로 좋지가 않다. 장모에 붙어다니는 형용사만 추려보아도 잔소리 많은 장모, 오만한 장모, 사나운 장모, 심술장이 장모 등 대체로 부정적이다.

우리 한국에 있어 장모 이미지가 긍정적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 속담에 장모는 사위가 곰보라도 예뻐한다니, 사위에겐 어머니보다 장모라느니, 기쁜 일은 꿈에 사위 본 듯하다 하고 반가운 일이면 사위가 왔나 신을 거꾸로 신고 나오게… 한다. 그래서 한국의 시어머니-며느리 사이는 미국의 장모-사위 사이만큼 티격태격한다. 늦더위를 늙은 장모의 여름이라고 호칭한 잠재심리를 알만하다.

미국에서는 사위 입장에서, 한국에서는 시어머니 입장에서 비유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말은 죽 먹은 설거지 딸 시키고 비빔그릇 설거지 며느리 시킨다 하듯이 따스한 봄볕에 딸을 쬐이고 살갗 타는 가을볕에 며느리 쬐인다는 속담에서 생겨난 것 같다. 그 증오의 늦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짜증나는 요즈음이다.

고운석 <시인·남구발전협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