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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도리(道理), 즉 본체와 사물, 즉 현상(現象)과의 관계는 마치 물체와 그림자와의 관계와 같아서, 본체가 없으면 현상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현실을 무시하고 본체에만 집착함은 그림자는 버리고 물체만 남겨두는 것이니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비린 것을 그대로 두고 파리떼만 쫓아내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1392년부터 1863년까지 472년동안 325년이나 가뭄 피해를 기록한다. 그중 하나로 정조 22년 6월 12일(무오년, 양력 1798년 7월 25일)에 충청도 관찰사 한용화는, “홍산현의 농부 김이원 등이 ‘본래 매오년(千年)마다 가뭄이 심한데, 나라에서는 아무조치가 없었다’고 불평을 퍼뜨리고 있으니 처벌하겠다”는 장계를 올렸다.

관찰사 한용화는 앞에서 말한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사건은 가뭄주기의 최초 기록이란 사실 외에, 가뭄이 민심을 동요시키기도 하고 결집시키기도 함을 알려준다. 한데 지금은 사람들이 보통 가뭄에는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요즘 가을 가뭄을 보더라도 사실은 심각한데 일부 농민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옛날 같으면 가뭄 불평때문에 제2의 관찰사가 나타나 처벌하겠다는 장계가 쌓였겠지만, 댐 공사로 인한 수자원이 어느정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기후변화를 보면 심상치가 않다.

충청 이북지방으로는 국지성 폭우로 집과 논밭이 사라지고 인명 피해가 크지만, 반대로 남부 호남지방의 경우는 가뭄 또한 잦고 ‘폭염주의보’도 자주 내리고 있다. 지난해 여름만 해도 듣지 못하던 특보다. 이것은 ‘한파주의보’에 대응하는 말로 ‘무더위로부터 국민 건강을 보호하고 국가 산업경제 활동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올부터 기상청이 ‘폭염특보제’를 도입해 시범 운영하고 있고, 내년 여름부터는 정식으로 도입된다.

‘폭염특보제’는 이미 미국, 일본, 영국 등 여러나라에서 운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여름더위는 특보제를 도입할만큼 혹심하진 않았지만 온난화로 고온의 날이 많아져 ‘한국인의 생체균형 이상이 올 수 있다’고 판단, 내년부터는 낮 최고기온이 섭씨 35도가 넘으면 폭염특보를 발령하게 된다. 처서(處暑)가 지나도 폭염의 고통을 볼 때 잘한 일이다. 계절로 보는 처서는 모기가 들어가고 귀뚜라미가 나온다는 절기다. 이 날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 만난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떼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찢어졌네”하고, 톱은 뭣에 쓰려고 가져가느냐고 귀뚜라미에 묻는다. “추야장(秋夜長)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낭군 애(창자) 끊으러 가져간다” 남도(南道)의 우화성 민요다.

그런데 올 처서때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면 임 기다리는 사람이나 우화성 민요도 없었을 것이다. 허나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단장’, 곧 애끊는 톱소리로 듣는다는 것은 극도로 세련된 우리 전통적 정서의 한 유형이 되고 있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하면 목석같은 사나이도 괜히 슬퍼 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옛 선비는 과거길에 올르거나 타향에 벼슬살이 갈 때 고향의 귀뚜라미를 풀섶에 담아들고 가서 창변에서 울려두고 고향의 소리를 듣는 풍류가 있었던 것이다.

소음공해가 없었던 옛날에는 청각이 예민했던지 관북 귀뚜라미 소리 다르고 호남 귀뚜라미 소리 다르다 하여, 서울 목로집 처마에는 향토색을 우는 귀뚜라미를 울려두고 향수유객을 했을 정도였으니, 이토록 세련된 벌레문화가 이 세상 어떤 다른나라에 없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교통의 발달과 통신의 발달로 이런 문화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귀뚜라미하면 짜증스러운 더위가 물러간 시원한 가을, 풍요로움을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 한국 사람은 귀뚜라미하면 가뭄, 무더위, 태풍, 홍수 다 잊고 정서적으로 이용하는데 딴 나라 사람들은 실용적으로 이용한다.

중국에서는 투견, 투계를 하듯이 귀뚜라미로 투충을 하여 도박을 했다. 대만, 태국, 버마 등지에서는 귀뚜라미를 기름에 볶아 팔고 있다. 그런데 시원한 가을을 느끼고 애끊는 정서적 효과만을 취하는 한국은 귀뚜라미의 낙원이 아닐 수 없다.

고운석 <시인· 남구발전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