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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부용(初發芙蓉)이란 말이 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연꽃이니 얼마나 싱그럽고 신비하며 가슴 벅찬 순간이겠는가? 하여 이 말은 미인에 대한 칭송 또는 어떤 작품의 청신함을 찬미할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초발' 곧 처음 피어남이란 이 말은 듣기만 해도 왠지 가슴이 막 뛴다. 불교에서도 초발심이란 말이 있는데 신심(信心)을 내는 처음의 간절함이나 야무지게 굳음을 의미한다.

처음은 언제나 설렘과 함께 강약간의 떨림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첫 키스가 그러하고 입학과 입사 등은 물론 첫날밤의 그 긴장과 떨림이라니, 사뭇 젊어진 기분이다. 하여튼 새해에는 뭔가 좀 가슴 뛰는 일이 있길 바란다.

시작은 아무래도 신년이란 말과 관계하여 자주 말해지곤 하는데 당나라 때 유장경(劉長卿)의 ‘신년작(新年作)’이란 시도 이맘때면 자주 입에 올려진다.

‘새해 되니 고향 생각 간절해/ 하늘 끝에서 홀로 눈물짓는다// 늙어서까지 남의 밑에 있는 몸/ 봄이 와도 언제나 나그네 신세라니// 고갯마루 원숭이들도 아침저녁 같이들 살고/ 강가의 버들도 바람과 안개랑 함께 살구나// 이미 장사의 태부와 같은 이 몸/이제 또 몇 년을 이렇게 지내야 할까....’

거룩한 고독이나 눈부신 호젓함이 아닌 철저히 홀로 새해를 맞는 유배객의 처량함이 솔솔 묻어나는 시정이다. 특히 원숭이들은 가족과 함께 하고, 버들은 바람과 안개와 더불어 있어 홀로가 아니라는 데에 이르면 자신의 고독과 소외가 더욱 절실하고 처량하게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음모에 의해 억울하게 장사란 곳으로 유배된 태부 벼슬을 지낸 가의(賈誼)와 같이 억울하기 그지없는 처지라니…. 새해라 하여 무언가 확 달라진 것처럼 떠들썩하지만, 사실 하늘과 바람, 해와 달 무엇이 달라지고 변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왕 새로 시작하는 것이 새해라면 어떤 떨림이나 긴장 그리고 기대되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가 바뀌어도 그 모양 그 팔자, 시작이라 해도 뭐 별반 다를 게 없는 밋밋한 그런 이웃들이 적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눈부신 고독이나 거룩한 소외가 아닌, 이른바 ‘괄호 밖’의 이웃들이 적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새해니 초발심을 내자는 둥, 초지일관하자는 둥 참으로 눈물겨운 아름다운 말들을 쏟아내지만, 그래 무엇에 초발심을 내자는 것인지, 하다못해 ‘대망의 80년대’라든가,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등, 뭐 기대라도 걸어두고 초발심 운운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러질 못하니 아쉽고 아쉽다.

이젠 ‘희망의 혁신도시 건설’이라고나 해야 할까? 지금 우리 주위엔 시작이 더 이상 긴장이나 떨림이 아니라 야윔과 등 휨의 가중이며, 새해가 등 시리고 속 차가운 혹한의 중심이라면, 저 당나라 유장경의 고독이나 소외와 무에 다르랴. ‘혼자’를 즐기고 ‘소외’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부디 바라건대는 죄 없이 영어의 몸이 된 자 모두 풀려나고, 순하게만 보이는 저 흰 눈이 악마와 저주로 보이는 헐벗은 사람들에게, 그래 새해엔 이렇게 하자는 둥, 설사 거짓일지언정 무언가 목매어 달 희망의 화두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공자께서 ‘일이관지(一以貫之)’라며 유교도들을 독려했듯이, 하나로 매진할 그 무엇이 있는 삶, 그런 인생이라야 새해니 뭐니 하여 설레고 가슴 뛰지 않겠는가? 연일 이어지는 폭설은 무슨 심사로 ‘흰 물감’을 저리 쏟아대는지 모를 일이로되, 다만 저 흰 색의 과다사용으로 자금이 흘러 들어가 노동자의 임금을 깎거나 급여를 동결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흰 눈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임을 보고 임금을 걱정하고 세금 운운하는 걸 보니 필시 나도 나잇살이나 챙겼나 보다.

경인년 새해, 떠들썩한 구호보다는 잔잔하고 다수운 구호 하나 붙잡아보자. 빛은 구멍으로 보다 강하게 들어온다는 말을 떠올리며, 답답한 가슴에 구멍 하나 뚫고 싱그럽고 풋풋한, 그러면서도 찬 등 덥혀 줄 다수운 빛줄기를 맞아보자. 겨울 있어 머잖아 새봄 올테니….

최한선<전남도립대학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