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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바위와 용랑 | | | 입력시간 : 2010. 03.11. 00:00 |   |
기암 괴석으로 이루어진 용암산과 예성산이 동서로 우뚝 서 있고 화학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절벽인 양안을 구비쳐 흐르는 춘양면 용두리는 전설의 고장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전 이 마을에 용랑이라는 마음씨 착하고 얼굴이 고운 처녀가 늙은 부모를 모시고 세식구가 넉넉하지 못하지만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용랑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길쌈이나 김매기 등 품을 팔아 늙은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있었다. 두 노부부는 비록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했지만 어질고 착한 용랑의 지극한 효성에 외로운줄 모르고 늙은 만년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이 노부부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혼기가 찬 용랑에게 좋은 짝을 맺어 주는 일이었다.
「여보 영감 용랑이도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됐으니 좋은 신랑감을 골라 보세요」
「암 그래야지, 용랑이는 얼굴도 곱고 마음씨가 착하니 좋은 천생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살수 있을거야. 내년 가을에는 꼭 시집을 보내야지」
저녁 밥상을 물리친 노부부는 애지중지 길러온 효녀 용랑의 혼사에 관하여 희망에 찬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사에는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이 평온한 집안에 먹구름이 덮어 왔다. 용랑의 아버지가 시름시름 앓아 자리에 눕게 되었다. 효녀 용랑과 그 아내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눈보라가 예성산 골짜기를 휘몰아치는 그 해 겨울에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어서 홀로 남은 어머니도 영감을 잃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하니 천애의 외로운 몸이 된 용랑의 슬픔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웠다. 사고무친이니 친척집에 의탁할 곳도 없고 약혼한 처지도 아니니 어느 남자에게 몸을 의지할 수도 없었다.
슬픔을 깨물며 생계를 위해서 베틀위에 앉아 길쌈으로 슬픔을 달랬고 부모의 삼년상을 마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름철의 어느날 저녁 폭풍과 함께 몰아친 빗방울은 호우로 변하고 밤낮 가리지 않고 쏟아지니 온 마을이 홍수에 잠기게 되었다. 용랑은 홍수를 피하기 위해 예성산 중턱에 있는 동굴 속으로 살림도구를 옮기게 되었다. 이 동굴에 와서도 여전히 베틀 위에 앉아서 베를 짜는 일과는 계속되었다.
동굴에서 베를 짜는 용랑에게 커다란 불행이 닥쳐왔다. 때는 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이 강토를 재차 유린당하고 있을 때였다. 수만의 왜병들은 물밀듯이 국토를 짓밟고 온갖 만행이 자행되고 있을 때인지라 이곳 예성산 기슭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왜병의 부대가 갖은 약탈과 살육을 하며 예성산 기슭에 진을 치고 예성산성과 대치하고 있을 때 베를 짜고 있는 용랑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동굴을 찾아든 왜장은 용랑의 아릿다운 자색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야수의 본성을 드러내 용랑에게 덮쳐왔다.
왜장의 불의의 기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겁에 질린 용랑은 온갖 힘을 다하여 반항하다가 정색으로 왜장을 꾸짖기를
「네 이놈! 짐승만도 못할 왜놈아 ! 어찌 감히 규중의 처자를 겁탈하려 하느냐!
내 일시에 양친을 여의고 천한 목숨을 진즉 끊으려 했으나 삼년상이나 마치려고 구차하게 명을 이어 왔거늘 오늘 네놈으로 말미암아 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분하고 원통하다. 네 놈에게 욕을 당하느니 보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하에 계신 부모님을 뵈오려 가리라」
라고 꾸짖는 말이 끝나자 왜장을 껴안은채 바위아래 예성강으로 몸을 던졌다
이런 말이 있는 후부터 이 고을에는 가뭄이 계속되고 역질이 번지고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이 참상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진사 정근이 이곳을 찾아 예성강변을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광풍이 불어오면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베틀을 짊어진 낭자가 나타나지 않는가.
정근은 발을 멈추어 돌연히 나타난 낭자를 향해 묻기를
「낭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냐, 무엄하게도 내 앞을 감히 방해하느냐 ?」
하니 낭자는 슬픈 얼굴을 지으며 엎드려 하소연을 하기를
「소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예성산 동굴에서 베짜는 몸으로 홀로 살아 가던중 왜병의 침범으로 왜장을 붙잡고 이곳 예성강으로 투신한 용랑이라는 처녀이온데 생전의 원한이 하늘에 까지 사무쳐 이 고을에 가뭄이 계속되고 역질이 유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어르신께서 소녀가 몸을 던진 바위위에 정자를 지어 소녀의 죽음을 가상히 여겨 주신다면 소녀의 영혼이 안식을 찾아 이 지방에 다시는 재앙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근은 그 길로 돌아와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용랑의 의로운 죽음을 알고 소원대로 그 자리에 정자를 지어주었는데 과연 그 후부터는 풍년이 들고 재앙이 없어졌다고 하여 용랑이 베를 짠 동굴의 바위를 베틀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베틀바위의 근처에는 예성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정유재란시 이순신장군의 막하에 있던 김대인과 이곳 거사 김명철이 의병을 모아 이 산성을 구축하여 항전 하였다는 전적지와 그 유적비가 있다.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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