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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 같은 더위의 기승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조석으로 서늘함이 물씬한 가을 맛이다. 그래서 우리 유한자는 세월 앞에 참으로 숙연해질 밖에 없지 않는가 싶다.

변하는 것이 조석(朝夕)으로 가장 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하는데 우리 시조 가운데 그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멋진 작품이 있다. 다름 아닌 고려 말 정몽주의 제자인 야은 길재(1353∼1419)의 <오백년 도읍지>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의 오백년 수도 개성을 찾은 고려 유신(遺臣)의 참 씁쓸하고 허전한 회고담이다. 가장 가슴을 후비는 대목은 산천과 인걸의 대조적 표현이다. 산천은 의구(依舊: 옛날 그대로의 모습)한데 인걸(人傑:사람)은 간 데를 모른다는 말이니 무한자와 유한자의 극명한 대조로써 산천과 인걸을 동원한 훌륭한 시라 하겠다.

게다가 유한자의 허무하고 안타까우며 서러운 감정은 ‘태평연월(太平烟月: 잘 나가던 시절)이 꿈 이었구나’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그렇다. 인생은 한바탕 꿈이다. 그런 데도 사람들은 그 것을 잘 모른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기세, 산을 뽑아서 들어 올릴 것 같은 기개도 모두 다 지나간 한바탕의 꿈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잖은가?

그런데 얼마 전 의구한 것, 변하지 아니한 것의 대명사로 대표되는 산천이 어이 허물어져 버리는, 그래서 한바탕의 먼지가 되는 현장을 목격했으니 그 때의 심정이라니, 한마디로 만감이 교차되었다.

중국 절강성 태주시 내에는 ‘삼문현’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 성종 시절 나주 출신 금남 최부(1454∼1504)가 1488년 1월 3일 제주도에서 부친상 소식을 듣고 빈소를 향하여 출발했다가 폭풍우에 밀려 14일간 천신만고의 표류 끝에 당시 중국 절강성 ‘임해현’ 우두외양(牛頭外洋: 바위 모양이 소머리를 닮은 산)에 도착하여 약 6개월의 노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 첫 귀착지 이다. (우두외양은 최부 당시는 임해현이었고, 지금은 삼문현에 속한다.) 그런데 이 곳에 문제가 터졌다. 그 것은 임해시와 삼문현 사이에 붙은 최부의 첫 귀착지 논쟁이다.

위 두 지방자치단체는 ‘우두외양’의 소재지를 서로 자기 경계라고 우기면서 그 곳을 개발하여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야심찬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개발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다 보니 편의 시설을 건설하는데 불편을 주고 있는 우두외양을 허물고 만 것이다.

필자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는, 약 3분의 2가 파괴되어 소머리 형국이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그 곳 환경운동가의 도움으로 허물기 전에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두외양, 곧 소머리 산을 보고 최부 선생이 그 곳을 좌표 삼아 귀착지로 여긴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그 산을 중시하는데 저들은 그런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내 눈 앞에서 산천이 허물어져가는 신음 소리를 듣는 조선 후예의 비극이라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의구하다던 산천’인데, 아, 이젠 오백여 년 전 최부 선생도 간 데 없고 그가 발을 디딘 우두외양도 간 데 없으니 이제 인걸과 산천이 모두 다 유한한 것인가 싶어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삼문만’의 해안선 길이가 12㎞ 이상이다 보니 임해와 삼문 두 지자체에 걸쳐 있을 수밖에…. 그래서 서로 자기네 영내에 귀착한 것이라고 주장할 만하지만, 개발을 미명 삼아 산을 함부로 부수고 무누는 작태라니….

이제 무엇을 무한하다고 해야 좋을지?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참 갑갑하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했는데 산천이 의구치 못하다면, 아니 산천이 유한한 생명을 지닌 사람과 같다면, 이제 사람이 얼마나 더 오만해질까? 얼마를 더 오만하고 나서야 산천 앞에 머리를 조아릴 것인가?

최한선 <전남도립대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