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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낮 경북 문경시 마성면 능곡산 자락의 농촌 마을 ‘정리’. 4륜구동 차량을 타고 초록이 무성한 산길을 5분 오르자 오른쪽에 누런 들판이 나타났다. 말라죽은 옥수수들이다. 옥수수밭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바닥이 굴착기로 헤집어 놓은 듯하다. 그 위로 부러진 옥수숫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2000여평 옥수수밭 가운데 1000여평 이상이 ‘폭격’을 맞았다. 밭 주인 이상집(59)씨는 “7월부터 밤마다 나타나는 멧돼지 서너 마리가 주범”이라며 “속이 상해 올해는 아예 수확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야생동물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폭증하고 있다.

인근 박상학(56)씨의 과수원. 8월 말에 제맛을 낸다는 사과 ‘홍로’ 나무 아래는 말 그대로 ‘난장판’. 찢어진 사과봉지와 과육(果肉)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간 사과들, 부러진 가지…. “누가 멧돼지를 ‘무식한’ 동물이라 캤심니꺼? 갸들, 7월에는 아오리, 8월에는 홍로, 9월에는 양광, 10월에는 부사…. 사과도 맛이 드는 순서대로 골라 따먹습니다. 열매에 종이 봉지를 씌워 놓아도 귀신같이 알아내지예.”멧돼지가 접근할 수 없는 나무 위쪽 사과들은 가운데가 움푹움푹 패어 있다. 높은 곳에 열린 사과는 까치·어치 등 새들 차지. 과수원 통로에 심어진 콩 줄기는 윗부분이 뜯겨 있었다. “이놈의 고라니들까지…” 열매없는 콩을 들여다보던 박씨는 말을 잃었다.

농민들도 철조망·경비견 등은 물론, 맹수의 배설물, 사람의 머리카락, 나프탈렌 등 기상천외한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다.

대구 달성공원에는 최근 ‘호랑이 똥을 나눠줄 수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하루 10통 이상 걸려온다. 이달 초 전남 장흥에 사는 박모(54)씨가 호랑이 똥을 고구마밭에 뿌려 멧돼지를 퇴치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이후부터.

16일에는 전남에서 벼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호랑이 똥 2㎏을 비닐봉지에 담아갔다. 이번주와 다음주에 발생할 분량의 호랑이 똥도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 달성공원 이대용 사육계장은 “호랑이 2마리가 하루 배설하는 300ｇ의 똥을 두고 경쟁이 치열하다”며 “같은 고양잇과 맹수인 사자똥도 권해봤지만, 농민들은 ‘사자는 우리나라 동물이 아니어서 효과가 없다’며 호랑이 똥만 고집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기품목은 사람의 머리카락. 머리카락에 밴 사람 냄새가 산짐승을 쫓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발소와 미장원에 머리카락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 포항과 문경, 청송 등 산간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다. 인공적인 향이 강한 나프탈렌과 시간대별로 ‘뻥’하는 폭음을 내는 장치인 ‘카바이드’ 시설도 많이 찾는다. 그러나 모두 효과는 미지수다.

총과 사냥개는 전통적 수법. 다만 현행 총포법은 야간 총기류의 사용을 규제하고 있어 한계가 있다는 것이 농민들의 불만이다.

사냥개도 힘을 쓰지 못한다. 농민 박상학씨의 경우 지난달에 이웃마을에서 한마리 300만원이라는 사냥개 5마리를 빌려 과수원에 풀어놨다. 그러나 “200근(120㎏)도 넘는 멧돼지 두어 마리와 싸우다가 그만 두 마리는 죽고 말았다”고 말했다.

환경부가 분류한 유해 조수는 멧돼지, 까치, 청설모, 고라니, 꿩 등. 환경부에 따르면 1995년 100㏊당 3.8마리와 3.3마리이던 멧돼지와 고라니의 개체수는 각각 4.1마리와 6.5마리로 늘어났다. 2002년 121억원이던 야생동물 농작물 피해액도 2003년 179억원, 2004년 206억원으로 크게 늘고 있는 추세. 자연자원과 이상욱 담당관은 “이제는 주민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야생동물 개체수를 조절해야 할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환경부는 철조망·경음기 등 시설비 일부를 지원하는 한편 수확기인 9,10월에는 농작물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곧바로 포획에 나설 수 있도록 수렵단도 운영한다. 그러나 이정도 수준의 대책으로는 야생동물을 막기 어렵다는 것이 일선 시·군 관계자들의 중론. 포항시 한 관계자는 “야간 사냥 허용, 전기 목책 보급 등 획기적인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머지않아 화난 농민들이 야생동물을 무차별로 남획할지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