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뉴스

땅의 냉기가 가셔가고 남쪽의 훈풍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하면 우리 집 마당에 심겨져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 내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잔뜩 웅크린 채 긴장되어 있던 잎사귀들이 물기를 머금으며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가 하면 봉우리마다에는 꽃을 피워내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이 모여드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리는 것은 목련(木蓮)이다. 몇 년 전 화순에서 요가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제자의 집 마당에서 가져와 담벼락 곁에 심었던 것이 벌써 지붕을 훌쩍 넘게 자라 우리 집에서 ‘봄의 전령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목련은 다른 말로는 ‘봄을 맞이 한다’는 의미의 영춘화(迎春化)라고도 불리는 꽃으로 초봄에 크고 향기 있는 흰꽃이 잎 보다 먼저 피는데 그 자태가 곱고 우아하여 기품 있는 여인네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꽃 봉우리가 피어오를 때의 그 청순한 모습에 비하여 질 때 너무나도 허망하게 사그라들면서 그 고상한 자태를 지켜내지 못하는 점이라고 하겠다.

목련꽃이 그 삶을 다하여 가픈 숨을 몰아쉴 때쯤이면, 우리 집 마당에서는 다시 동백(冬柏)이 그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10여년전 집을 새로 지을 때, 건축을 맡았던 김사장이 ‘재래종’이라며 한그루 심어준 것이 어느덧 담장을 넘길 만큼 자라서 봄이 되면 매혹적인 새빨간 꽃망울을 터트려 우리 집의 정취를 한결 밝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꽃이 피고 지면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은 식물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 집 동백 또한 언제부터인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더니 자연스럽게 번식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새끼 동백이 엄마 곁에 지나치게 바짝 붙어 성장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되어 작년 봄 침실 앞 공터로 옮겨 심어주고 아침마다 물을 주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새끼 동백은 나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무럭무럭 자라더니 어느새 엄마 키에 버금갈 만큼 자랐고 드디어 금년 봄에는 몇 송이의 꽃을 피워냈으니 얼마나 대견스러운 일인가.

이처럼 목력에 뒤이어 동백이 우리 집 마당을 치장하다가 그 숨이 다하여 붉은 꽃망울이 떨어질 때쯤이면 또 다시 철쭉이 그 뒤를 잊는다. 철쭉은 진달래와 더불어 철쭉과에 속하는 활엽관목으로 진달래가 보통 이른 봄 산지(山地)의 양지바른 곳에 피는데 반해 봄의 절정기에 정원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네 민간에서 진달래를 흔히 ‘참꽃’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철쭉을 ‘개꽃’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왜 비슷한 꽃을 두고 하나에는 ‘좋고 참되다’는 의미의 참 꽃이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에는 ‘나쁘고 천하다’는 의미의 개꽃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나는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 있지만 짐작컨대 진달래는 그 꽃으로 술을 담구어 먹는 등 식용이 가능한 반면 철쭉은 불가능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떻든 늦은 봄 우리 집 마당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꿀벌과 나비가 찾아들게 해준다는 점에서 비록 개꽃일망정 나에게는 고마운 꽃이 아닐 수 없고 더욱이 그 개화 기간이 짧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고마운 존재이다.

그러나 철쭉 또한 그 정해진 수명이 있음을 어찌하랴. 철쭉꽃이 서서히 그 고운티를 잃어갈 무렵이면 우리 집 마당에서는 다시 담장 따라 심어 놓은 넝쿨 장미가 그 자태를 뽐내기 시작한다. 넝쿨장미는 그 꽃송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 보다는 함께 어우러져 연달아 피워내는 꽃의 군집성(群集性)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는 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넝쿨장미는 때때로 나에게 담장 넘어 골목길을 빗자루로 쓸게 하는 수고를 안겨주고 있다. 떨어진 꽃과 이파리들이 골목길에 뒹굴고 있으니 명색이 교수 체면에 그것을 방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6월에 접어들면서 주변 산의 신록이 그 푸르름을 더해갈 즈음이면 우리 집 마당에서는 철쭉꽃이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고 대신 ‘치자꽃’과 ‘봉숭화꽃’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경쟁적으로 꽃망울을 터트린다.

치자는 예로부터 천연 염색재료로 널리 이용되던 꽃으로 염색 후의 색깔은 흔히 치자 빛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붉은색을 띠는데 반해 그 꽃은 하얀색을 지니고 있으니 조금은 기이하기도 하다.

한편 봉숭화꽃은 우리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도 소녀들의 손톱 장식에 흔히 이용되는가 하면, “울밑에선 봉숭화야….라는 가요로 우리네 정서와도 가까운 꽃이다.

내가 듣기로 이 노래는 6․25전쟁 기간에 고향을 떠나 온 인민군 병사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상당기간 금지곡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니 도대체 이데올로기 대립이 무엇인지….

비록 크지 않는 마당이지만, 그곳에 꽃을 기르며 날마다 지켜보는 재미에 나는 아침마다 창문을 연다. 치자꽃을 끝으로 금년의 꽃 잔치가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보면서 나는 또다시 내년 봄을 기약하는 것이다.

오수열 <조선대 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