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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의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표정에 나타나지 않는게 치욕이다. 그저 얼굴을 돌리는게 고작이다. 그러므로 치욕은 사람들의 감정 중에서 가장 은밀한 것이다. 한데, 우리 한국인은 너무 쉽게 감동한 나머지 속고 속아 치욕을 당한일이 많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한 여순(旅順)감옥의 일본인 소장 딸 구리하라 할머니가 안 의사의 사당을 집안에 차리고 31년 동안 받들어 왔다는 보도가 있었을때 많은 한국인들은 그 여인을 두고 퍽 측은하게 생각했다. 속죄의 뜻도 갸륵하려니와 이족 이방인의 행위기에 감동이 컸던지 수백통의 감사편지가 답지했었다고 들었다.

우리 한국인은 감동이 빠른 편이다. 이 구리하라 할머니가 안 의사의 사당(祠堂)을 모신 저의를 따져보기 전에 우선 나타난 사연만으로 감동 먼저 해놓고 본다. 감동한 사연이 후에 변질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뒷일이요, 일단 감동부터 한다.

그러나 이 할머니가 안 의사의 사당을 모신 이유는 안 의사를 위하거나 추모하기 위한 공감 사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행을 막기위한 민간신앙의 한 패턴으로 안 의사의 영혼을 이용한 것이다. 우리 옛 선조들도 흔히 그리했듯이 고을이나 집안에 무슨 불행이나 병이 잦으면 그 고을이나 집안에 연관된 사람으로 원한 품고 죽은 어떤 원령의 탓으로 단정한다.

그 해코지를 막는 방법으로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신위(神位)를 모셨다. 안 의사가 처형된 직후부터 이 구리하라 집안은 급작스레 기울기 시작, 그의 언니가 아프기 시작한지 30분만에 급사하고 그의 어머니는 영문 몰래 죽어갔던 것이다.

그의 맏아들은 정신착란으로, 둘째는 폐병으로 가슴뼈를 도려냈으며, 맏딸은 과부가 되는 재변이 잇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 원령의 주인공으로서 자기 아버지가 소장으로 있을 때 처형한 안 의사를 추정한 것이다. 이렇게 모셔진 안 의사의 사당을 두고 우리는 공감해야 하겠는가. 오히려 안 의사의 장한 유령을 위해서는 이같은 소행은 모욕인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교토 방광사(方廣寺) 둔덕에 귀무덤이라는 꽤 우람한 탑이 서 있다. 임진왜란 때 전과를 실감하고 싶었던 도요토미가 조선 병사들의 코를 베어 보내라고 하명했었다. 이 비정한 하명을 받은 잔인한 왜병은 노약자와 부인들의 코, 도합 3천4백87개를 열다섯개의 큰 통에 담아 후송시켰던 것이다.

이 비정의 전과를 도요토미가 확인하고 묻어둔 곳이 곧 귀무덤이다. 코가 귀로 잘못 와전되어 이같이 이름붙은 원통한 이 현장에 탑을 세워놓고서 적병이라도 이렇게 후하게 매장하여 공양을 한다는 자인박애의 표현으로 이 귀무덤을 이용해 왔던 것이다. 그 자인박애 운운한 석비(石碑)가 오늘날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 귀무덤의 설명문에도 그 박애 문귀가 자주 나오고 있다.

그후 4백여년 동안 숱한 한국사신이 이 귀무덤을 거쳐가면서 여우길(呂祐吉) 일행은 「차마 그 무덤을 힘들여 디딜수 없었다」했고, 오윤겸(吳允謙) 일행은 「통곡을 참을수 없다」고 했지만 그밖의 몇 사신들은 잔인한 일본인의 '위장박애'에 속아 넘어가 공양하고 있다는 사실만에 눈이 어두워 감동을 하고 있음을 본다.

한말 일본야욕의 앞잡이로 일본 불교가 부산에 자리잡았을 때, 주지(住持) 오꾸무라는 임진왜란 때 저지른 일본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고 이 말에 당시 조정은 속아 포교를 허락, 한국침략의 교두보를 확보시켜 주었던 일도 새삼스럽다. 한데, 또 왜놈들은 우리땅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며 세계인들을 속이고 있다. 한데도 또 속아 쉽게 감동하다간 과거처럼 치욕을 당할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고운석<시인. 광주남구발전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