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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이것으로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산 자를 땅 속에 매장한다. 하지만 자신이 행하고 한 말을 속이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자를 종종 본다. 그레엄 그린이 그의 소설에 잘 쓰는 문구로 미혼모(未婚母)의 변명이란 영국 속담이 있다.

처녀가 애 낳아놓고서 하는 변명이란 뻔한 것으로 하나마나한 변명을 빗대어 말할 때 이 말을 쓴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한국 속담은 '미혼모의 변명'처럼 완전한 차단을 뜻하지 않고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가 된다. -옹달샘가에 빨래하는 기혼의 아낙네들이 모여 있었다. 이 아낙네들은 아무개 처녀가 애를 뱃다고 히히닥 거리며 흉을 본다. 이 말을 들은 처녀는 할 말이 있었다.

"저희들은 여러번 애를 뱃으면서 처음 애를 밴 나더러 야단들이라"고. 이건 남도(南道) 우스갯 얘기다. 잘못된 일에는 예외없이 자기 이외의 작용으로 탓을 하지않고는 성이 풀리지 않으며, 그 탓을 너그럽게 수용하는 한국인의 공통된 의식구조를 익살하는 속담이요, 좋은 플러스 결과에는 왕성하게 제탓으로 참여하고, 나쁜 마이너스 결과에는 집요하게 남의 탓으로 소외시킨다. 결과에 직결되는 책임에 대한 자기부재에 도사가 돼있는 것이다.

안동 김씨 세도 밑에서 죽어지내던 이하응 대원군은 묵화와 글씨를 써서 근근히 생계를 이었다. 이 몰락 귀족을 조금이나마 배려한 것은 철종 말에 세도의 핵심을 이루었던 사동대신(寺洞大臣) 김병국이었다. 그 배려에 보은하는 뜻에서 대원군이 묵화를 그려 선물했다. 이 묵화를 들여다본 사동대신은 "어찌 평소의 영감 솜씨만 못하다"하고 섭섭해 했다.

이에 대원군은 "그동안 벼루를 죽여 놓았더니 그만…"하고 벼루탓을 한다. 옛 글쓰는 선비들은 벼루를 활인화(活人化)하여 사흘동안만 벼루를 갈지 않으면 벼루가 죽어, 먹을 잘 풀어주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기에 슬하에 먹을 가는 아이를 두어서 글을 쓰지 않더라도 벼루를 갈게 했던 것이다.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군(淸軍)에게 납치되어, 중국 보정부(保定府)에 유폐되었을 때 수행했던 문인(門人), 한석진은 바로 그 먹을 가는 묵동 출신이었던 것이다. 죽은 벼루의 묵화라 해서 반드시 신묘한 경지를 못 나타낸다고는 당시 사람들도 믿지 않았던지 이 대원군의 변명을 고사(故事)로 삼아 '운현궁 벼루탓'이란 속담을 있게 했다.

곧 한국인의 공통된 마이너스 결과에 대한 자기 책임회피의 성향은 풍운아 대원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마이너스 결과에 대한 책임회피가 한국인의 통성이란 증거로는 이 탓을 빗대는 속담이 많다는 점을 들수가 있다.

글 못하는 사내 필묵 탓하고, 떡 못하는 계집 쟁반 탓하고, 장님이 넘어지면 지팡이 탓한다. 잘살면 제 탓이고, 못살면 조상 탓이고, 이처럼 탓도 많다. 한데 민주당 최고위원인 정동영 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2월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그는 "우리는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만큼 미국과의 FTA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한미FTA로 경쟁력 강화와 국민소득 증가가 기대된다는 말도 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상대로 FTA지지를 설득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랬던 정 의원이 10월 13일 국회에서 "한미FTA는'낯선 식민지'이고, 국회가 이를 비준하는 것은 을사늑약을 추진하는 것과 같다"고 강변했다. 그는 한미FTA협상 수석대표였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에게 "미국과 한통속이다. 옷만 입은 이완용인지 모르겠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미FTA가 을사늑약이라니, 대한민국이 미국의 속국이라도 되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서울에 총독부라도 세운단 말인가. 3선 국회의원에 장관과 여당 의장을 지내고 4년 전 대선 때는 집권당 대통령 후보였던 정치인의 인식 수준이 겨우 이정도라니 참으로 실망스럽다.

김 본부장이 이완용이라면 2006~2007년 한미FTA협상을 성사시킨 노무현 대통령과 그 정권에서 당정의 핵심 요직을 두루거친 정 의원은 뭐가 되는가. 정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국민이 정 의원이 이완용인데 누구탓하는가 하고 꾸짖고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

고운석<시인. 남구발전협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