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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과 등소평(1) (208회) | | | 입력시간 : 2012. 02.13. 00:00 |   |
◆모택동과 등소평 1
모택동(1893-1976)은 등소평(1904-1997)을 비호했다.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은 곧바로 실권파 타도에 들어갔다.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모택동의 일갈은 유소기(1898~1969)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주자파 유소기와 등소평을 타도하자’는 대자보가 나불고, 주자파수괴1호 유소기 내외는 홍위병 앞에 끌려나가 수모를 당했다. “이 녀석들아 나는 엄연한 이 나라의 국가주석이다”라고 유소기는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주자파 수괴2호인 등소평에 대한 처분은 ‘가택연금(관찰처분)’에 그쳤다. 홍위병으로부터의 거처습격도 모면할 수 있었다. 격리심사(감옥행)에 넘겨지지 않은 것은 누가 보아도 관대한 것이었다.
모택동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는 그때 이렇게 지시했다. “소평은 건드리지마,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그는 인재다. 1년, 아니면 2년쯤 자리에서 물러나 있게 하면 그걸로 되겠지, 당적은 빼앗지 말도록”―.
그렇다고는 해도 문혁(文革)은 등소평 일족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안겼다. 장남은 홍위병에게 쫓겨 척추를 다쳤다. 5층 건물에서 뛰어내렸으니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세 딸은 모두 지방으로 추방당했다. 동생은 등소평이 주자파였음을 실토하라는 집요한 심문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정은 악회되었다. 1969년 4월 제9회 전당대회에서 임표(1906~1971)는 자신이 모택동을 이은, 제2인자임을 당규에 명문화했다. 곧 이어 ‘명령1호’를 발동했다. 북경에 머물러있는 원로간부들을 지방으로 소산시키라는 엄명이었다. 임표와 4인방(강청․왕홍문․장춘교․요문원)의 등등한 기세에 모택동․주은래(1898~1976)조차도 이를 막지는 못했다.
그해 10월 등소평은 아내, 계모와 함께 강서성 남창으로 유배되었다. 옛 강서군관학교 교장 관사가 숙소로 배정되었다. 세 사람은 2층에서 기거했고 1층엔 감시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등은 트랙터수리공장 직공으로 배치되었다. ‘등영감(老鄧)’이외의 호칭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나이 65세때의 일이었다. 처음 1년동안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등소평의 남창유배가 결정되자 주은래는 강서성 당서기에게 등의 가족을 불편 없이 보살피라는 당부의 사신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밖으로부터의 별다른 타격은 가해지지 않았다. 인고의 나날 속에서도 위안이 된 것은 불구가 된 아들, 그리고 흩어졌던 딸들이 돌아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등은 유배길에 오르기 전 모택동을 만났다. 주석은 말했다. “그대는 일은 잘하는데 방법이 엉터리야, 계급투쟁의 관념이 모자라, 밑바닥으로 내려가 몸소 실천할 필요가 있어”―, 그러면서 등더러 “할말이 있으면 해봐” 했다. 소평은 “네 할말이 있습니다” 작심한듯 뼈있는 댓구를 했다.
“어떻게 하든 임표에게 빌붙어 실천을 하고, 공도 없는데 공을 세운듯 위장도 하고, 일체를 의심하고 일체를 타도하는 방법을 익히면 되겠지요. 그러면 일하는 방법도 바르게 되고 계급투쟁 관념도 강하게 되겠지요” 그러자 모택동은 선문답 같은 묘한 말을 했다. “임표의 옳고 그름은 역사가 판단하겠지…” 임표를 불신하고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著者 姜元求 박사의 프로필
現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現광주여행문화원 회장/現 중국 심양. 남창 명예시민/ 前 전국시도관광협회연합회장/前 광주광역시관광협회장/ 前 광주권발전연구소장/前광주상아탑학원 원장 現 호남대학교 초빙교수
책 구입 및 연락처 :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062)652-8800
http://www.hanjoong.pe.kr/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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