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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사랑은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기도 하지만, 좋은 화폐가 통용되는 나라에서는 사업과 예술과 부가 번창하게 하고 악폐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나태와 무관심만이 팽배하게 한다.

한데 지폐(돈)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다. 역사상 가장 넓은 면적의 지폐로서 <기네스 북>은 1368년에서 1399년 사이에 중국 명(明)나라에서 발행된 ‘일관지폐’를 들고 폭이 22.8센티미터요 길이가 33센티미터라 돼 있다.

우리는 조선왕조 초인 정종(定宗)-태종(太宗) 연간에 발행된 지폐인 저폐(楮幣)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화주지(貨注紙)는 폭이 1척 4촌이요 길이는 1척 6촌이였으며, 그보다 작은 화상지(貨常紙)도 폭이 1척이요 길이가 1척 1촌으로 <기네스 북>에 제일 크다고 기록된 명나라의 일관지폐보다 한결 크다.

사회학자 달코트 퍼슨스 교수는 1달러 지폐의 실용적인 쓸모를 두고 “앞뒤에 요란스럽게 인쇄가 돼 있어 메모지로도 쓸수 없고 코를 풀기에도 너무 작으며 쏘시개로 쓴다해도 파이프 담배 불붙이는 것이 고작”이라 하고 돈의 크기는 돈에 따른 인심과 비례, 돈인심이 각박해 질 수록 돈의 크기가 작아진다 했다.

그런데 우리 옛날 넓었던 지폐는 쓸모도 많았다. 아이들 돌상 차려놓고 돌잡이시킬 때 이 지폐방석에 앉히는 풍속이 있었다. ‘돈방석’이란 말이 그래서 생기지 않았나 싶다. 돈에 여백도 많아서 돈에다 전갈 내용도 적고 장기도 하곤 했다.

우리 선조들이 구애(求愛)하는 데 꽃에 돈을 달아 처자집에 던지는 수법이 있었는데 그런 때는 지폐에다 연시(戀詩)나 연문(戀文)을 쓰기도 했으니 동서고금에 이토록 낭만적인 돈이 딴 나라에도 있었던가 싶다.

이처럼 넓은 만큼 실용가치도 컸던 것이다. 이성계(李成桂)가 등극하던 해인 공양왕 4년(1392)에 처음 이 지폐를 발행했다가 몇 달 만에 중지한 것을 태종 2년 (1402)에 부활시키고 있는데 그 때 지폐 한 장당 값은 쌀 한되 값이었다. 그 후로 지폐는 점점 작아졌다고는 하나 고종 때 호조에서 발행한 닷 냥짜리 지폐를 보면 요즈음 천원짜리 넉 장을 펴놓은 넓이쯤 된다.

돈방석은 못 되더라도 돈수건쯤은 될 수 있었다. 1983년 6월 11일에 나왔던 5천원 지폐와 1천원 지폐가 앞전에 쓰고 있던 것보다 최저 1밀리미터, 최대 12밀리미터가 줄었다. 세계의 통화로 불리고 있는 달러지폐와 비기면 세로는 거의 같으나 가로는 아직도 10밀리미터가 더 크긴 하다.

그런데 이런 돈의 크기와 작기를 떠나 또 착한돈, 나쁜돈 하며 돈에도 등급을 먹였다. 우리 조상들이 돈이 지닌 가치를 철저히 따지는 풍습때문이다. 피땀흘려 번 돈은 우전(右錢)이라 하고, 공짜로 생긴 돈은 좌전(左錢)이라고 불렀다. 돈을 따로 보관하고 용처도 달리 했다. 집안 혼례와 같은 좋은 일에는 꼭 우전만 썼다. 어머니들으 손수 베를 짜서 목돈이 생기면 따로 보관했다. 자식들이 공부에 쓸 필묵을 사거나 아파서 약을 지을 때 이돈을 사용했다.

경상도 순흥 만석꾼 황부자는 돈 씀씀이가 꽤 유별났다. 갖은 고생 끝에 거부를 이룬 그는 큼지막한 돈궤를 장만했다. 그런 후 궤짝 안 쪽을 두 칸으로 갈라 놓고 돈을 보관했다. 자신이 피땀 흘려 가꾼 곡식에서 나온 돈이거나 아내가 손수 길쌈해서 번 돈은 오른쪽에 넣고 소작으로 얻은 돈은 왼쪽에 넣었다. 주위에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반드시 용처를 물었다.

어느날 한 친지가 찾아와서 “아들놈 과거치르러 가는데 노자가 없다”고 하자 궤짝을 열어 보이고서 말했다. “악전인 좌전은 이리도 많지만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우전은 텅 비었네. 며칠만 기다리게.”했다. 그런데 3월 6일 열린 곽 노현 서울시교육감 항소심법정에서 ‘착한돈’논란이 불거졌다.

거액을 받은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가 “곽 교육감의 착한 돈이 어떻게 내게 오면 나쁜돈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형편이 딱해 선의로 돈을 줬다는 곽 교육감의 예전 발언을 겨냥한 항변이었다. 돈방석이 되고 돈에 연애편지를 썼던 때의 여유와 낭만에 비겨 날로 각박해가는 이 때, 두 교육자는 몰래 돈을 주고 받고도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잘 잤는지 묻고 싶다.

고운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