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뉴스

평소에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모른다.

을사사화 때 임형수(林亨秀·1504~1547)가 나주에서 사약을 받고서야 그 위험을 알았다.

열 살이 못된 아들에게 말했다. “글을 배우지 말거라.” 아들이 울며 나가니, 다시 불러 말했다.

“글을 안배우면 무식하게 되어 남의 업신여김을 받을테니, 글은 배우되 과거를 보지 말라.”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후한 때 범방(范滂·137~169)은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영제(靈帝)때 자청해서 형을 받으러 나가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악을 행하라 권하고 싶구나. 하지만 악은 할 수가 없는 법. 그래서 네게 선을 권하려 한다만, 나는 악이나 행하지 않으련다.” 씁쓸하다. 송나라 때 송첨(宋詹)도 유담(劉湛)을 섬기다가 당인(黨人)으로 몰려 잡혀가면서 아우에게 말했다.

“악을 서로 권하려니 악은 할 수가 없고, 선을 서로 권하다 보니 오늘 이런 꼴을 보는구나.” 다 맺힌 것이 있어서 한 말이다.

초나라 소와(昭王)의 첩 조희(趙姬)가 시집가는 딸에게 당부했다. “조심해서 선은 행하지를 말아라. 공연히 남의 질시만 받게 된다.” “악하게 행동할까요?” “선도 하지 말랬는데, 하물며 악을 해서야 되겠느냐?” 명나라 때 사조제의 ‘문해피사(文海披沙)’에 나온다.

네 이야기에 모두 난세를 살아가는 슬픈 표정이 담겼다. 이들은 모두 심지가 굳었던 사람들인데도 그랬다. 옳고 그른 판단이야 누구나 한다.

하지만 세상길의 시비는 선악에 따르지 않고 뒤집히는 경우가 더 많다.

착한 일을 하면 질시를 받고 모함을 받아 해를 입는다.

악한 일을 거리낌 없이 해야 권세를 잡고 지위가 높아진다. 배운대로 해서는 손해만 본다.

어찌할까? 아예 배우지를 말거나 선은 고개 돌려 외면하고 악이나 행하지 않고 사는 것이 험한 세상에서 그럭저럭 제 몸을 지키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약자는 살아남기 위해 한없이 몸을 낮춘다. 우리나라 비행기를 타보면 승무원, 특히 여 승무원들이 과도하게 친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는 아기를 달래주고 생일인 아이에게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어른에겐 퀴즈를 내거나 게임을 하게 해 상품도 준다.

짓궂거나 술 취한 승객이 수작을 붙이거나 희롱을 해와도 믿기 어려운 인내력으로 견뎌낸다.

기내에서 대기업 임원이 라면이 짜다느니 덜 익었다느니 생트집을 잡으며 세번씩이나 라면을 다시 끓여오게 하고 급기야 여 승무원의 얼굴을 잡지로 때렸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시쳇말로 참 ‘진상이다’ 싶었다.

하지만 항공사의 서비스 관행엔 문제가 없을까. 항공업체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승무원들에게 무릎을 꿇고 기내 물품 구입 주문을 받으라는 등 무한 서비스 제공을 요구한다.

승객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행패를 부려도 맞대응하는 것은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무한 서비스가 승객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조장한 측면은 없는가.

겨울에 백화점 주차장에 가면 마음이 편치 않다.

딸이나 여동생 같은 젊은 주차 안내원들이 추위에 떨면서 마치 북한 교통순경처럼 절도있는 동작으로 안내를 한다.

예쁘게 화장하고 멋진 제복을 입고 앙증맞은 챙 있는 모자를 쓴채 무릎과 팔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끊임없이 미소 짓는다.

인형처럼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딸랑이 손짓 안내를 하는 것을 보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차도우미(알바)로 불리는 이들은 박봉이다. 광주의 한 백화점은 이들에게 하루 10시간 근무에 월 140만원을 준다.

아무나 채용되는 것도 아니다. 키는 163cm 이상이어야 하고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한데 이와는 반대로 버스 정류장에서 담배꽁초를 버린다고 20대 청년을 훈계한 60대 할머니가 그가 때린 벽돌에 맞아 숨졌다.

자식 사랑에 눈 먼 부모들은 이틀이 멀다하고 학교로 달려가 선생님을 폭행한다.

욕을 보지 않고 봉변을 면하려면 엔간한 일에는 못 본척 눈감고, 부화가 끓어도 눌러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이 개판이다 보니 한국은 더더욱 심한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 버릇을 고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어디 그런가?

고운석 <시인> gjt252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