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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위대한 천재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며,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로써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다. 한데 “출판기념회를 열면 출마한다고 소문이 날 것 같아서….” 언론계 몇몇 후배와 만난 고건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 한다. 서울의 한 단골 음식점에서 오찬을 겸해 가진 조촐한 출판보고회였다.

이런가 하면 “보통 난리가 아니었지요. 주변 길이 다 막혀 버렸지요.” 광주의 한 기초단체장 측근의 말이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졸부들까지 합세 정치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어디 그 지역구만 그렇겠나. 그 상징적인 풍경이 최근 한 중앙지에 ‘눈도장 안 찍으면…출판기념회에 등골 휘는 지역 기업’이란 기사가 나왔다.

내년 지방선거에 나올 정치인과 교육감 후보자들의 출판기념회 러시에 죽어나는 것은 지방 기업이라는 내용이다. 국회의원만 하는 줄 알았던 출판기념회가 어느새 지방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대세다. 메이저리그냐, 마이너리그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책을 썼기 때문에 하는 행사가 아니다. 날짜와 장소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집필, 출판사 섭외, 초대장 발송 등을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기획성 정치 이벤트에 가깝다. 이름 알리고 힘 과시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답지하는 돈봉투가 훨씬 실속있다.

한 의원은 선거에서 진 뒤 백수로 지낼 때 했던 출판기념회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무료한 시간도 때울겸 출판기념회를 통해 돈도 마련할 겸…” 노벨문학상 수상작도 정가만 내고 사는 판에 정치인의 책은 수준 이하일지라도 책값의 수십배를 내고 산데엔 다 이유가 있다. 권력과 예산을 쥔 정치인들에게 밉보였다간 될 일도 안된다. 공무원·기업인 할 것 없다.

지방 교육감만 해도 그 지역 건설사들엔 학교 공사 수주를 좌우하는 존재로 비친다하지 않나. 그러니 봉투와 화환이 몰릴 수밖에. 수완 좋은 정치인은 한 번에 억대를 챙긴다고 한다. 그래도 회계보고 의무가 없다. 세금처리도 하지 않는다.

국세청장이 유력 정치인의 출판기념회에 화환을 보내는 판이니 세금매기자는 말 꺼내기가 민망하다.

이쯤되면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국가 공인 지하경제다. 책이라도 그럴듯하면 욕을 덜 먹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대개 ‘나 잘났다’는 천편일률의 자서전이다. 종이가 아까워 웃을 정도다. 오죽하면 ‘정치인이 쓴 책은 대부분 그렇고 그런 내용이지만 이 책은 다르다’는 보도자료까지 덧붙인 의원이 나오겠나.

그리 훌륭한 인생을 산 분들이라면 국회와 지방의회가 왜 이모양 이꼴인가. 국어시간엔 잠을 잤는지 책의 주제와 실제 행동 사이에 아득한 거리가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국회에서 폭력을 휘두르다 벌금형을 받은데 이어 얼마 전 대통령 경호차량을 발로 걷어찬 의원이 5년 전 낸 책은 ‘법 만드는 재미’였다. ‘법 깨는 재미’로 오독하진 말자. 그뿐인가. ‘법대로 살까 멋대로 살까’라는 자기 성찰적 제목의 책을 쓴 분이 좌충우돌 막말을 하질 않나…. 물론 옥고를 정성껏 책으로 만들어 길잡이가 된 의원도 없진 않다.

책값으로 두고가는 돈에 일일이 영수증을 떼주거나 신용카드로 결제해 근거를 남기는 분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극소수다.

그럼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를 아예 금지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진 않다. 탐욕스러운 출판기념회는 정치자금 규제를 피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개척한 우회로다. 달리 돈 구할데가 마땅찮으니 출판기념회로 긁어 모으려는 것 아닌가. 일종의 풍선효과다.

막으면 다른 길을 또 뚫을 게 분명하다. 이것저것 수집가는 소장품 전시회, 붓좀 잡는다는 분은 작품전시회라도 할지 모른다.

뜯어내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이쯤이면 밥값 좀 하라. 못하면 먹질 말던가. 죄없는 국민은 세금 내느라 허리가 휜다하질 않는가.

고운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