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뉴스

법은 인간 행위에 관한 일종의 질서이다. 그리고 그 질서라는 것은 다수 규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하나의 체계를 말한다. 한데 전 대주그룹 회장의 재판 판결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그 회장은 조세 포탈과 횡령죄를 저질러 2심 판결에서 징역형과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벌금을 내지 않을 경우, 노역장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되는데 판사가 노역일당을 무려 5억원으로 정했다. 때문에 판사가 피고인에게 특허를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고, 이는 곧 ‘향판(鄕判)’ 이라는 지역법관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향판제는 판사가 전국 법원에서 순환근무를 하지 않고, 지방 관할 법원 중 한곳에 부임하여 퇴임할 때까지 근무하는 제도를 말한다.

대다수 법관이 수도권 지역 근무를 원해 수도권에 자리가 부족해지면서 도입된 제도이다. 지역 사정에 밝은 해당지역 출신 법관들이 재판함으로써 판결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서다.

하지만 지역 유지나 향판 출신 변호사들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봐주기 식(式)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런데 판사와 달리 검사의 경우, 특정 고등학교나 지역 출신은 해당지역 근무에서 제외되고 있다. 즉, 검찰에서는 어떤 지방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를 그 지방에 파견하지 않는 ‘향피(鄕避)제도’를 운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향피제도와 비슷한 상피(相避)제도가 있었다. 상피제도는 4촌 이내의 친족관계에 있는 관리가 같은 관아에서 일하지 못하게 한 제도로, 조선시대에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의정부·의금부·사헌부·사간원과 문·무관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병조 등은 4촌 매부·동서까지 상피제도에 포함되었다. 또한 피고와 친한 사이거나 원한관계가 있는 재판관은 재판을 맡을 수 없었다.

어느 지방에 연고가 있는 관리는 그 지방에 부임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춘향전’에서 남원부사의 아들이었던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땅에 부임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고려 태조 때의 사심관제도나 조선 세종 때의 토관제도는 지금의 향판제와 비슷한 제도였다. 사심관제도는 그 지방출신 인물을 사심관이라는 관리로 임명한 것이다. 만약 해당지방에서 반역이 일어나면 사심관이 책임지게 하였다.

조선시대 토관제도는 4군 6진 개척으로 두만강 일대의 영토를 차지한 후 생겨났다. 당시 남쪽 백성을 북쪽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한양에서 함경도로 가려는 관리가 없자 그 지방 출신 인물을 관리로 임명한 것이다.

향판·향피·상피·사심관·토관제도 모두 당시에는 꼭 필요해서 생긴 제도였다.

‘일당 5억원 판결’은 바람직한 제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이 때문에 ‘지역법관’제도가 2004년 도입된 지 10년 만에 사실상 전면 폐지된다. 대법원은 내년 2월 정기인사 때 지역법관 임기 10년을 채우는 법관들은 다른 고등법원 관할지역으로 전보시키고 지역법관 신규 신청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지난 2일 밝혔다.

현재 309명의 지역법관 중 내년에 임기가 만료되는 법관은 155명이다. 지역법관 중 근무기간이 5~6년이 넘는 70~80명도 내년 2월 인사 때 전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5년 미만인 초임 지역법관들은 일반법관과 같은 기준으로 인사할 예정이다.

이로써 2004년 2월부터 시행된 지역법관제도는 그동안 지연 학연으로 얽힌 지역 인사들과의 유착이라는 폐해를 낳았다는 논란을 빚은 채 사라지게 됐다. 지역 법관 신청 없이 일반 인사 희망원을 통해 계속 지역근무를 하던 ‘지역연고 법관(향판·鄕判)’들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른 권역으로 순환근무를 하도록 할 방침이란다.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은 이날 서울 서초구 대법원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지역법관제도 폐지로 전체 인사 시스템 조정이 불가피하지만 지역 법관 300여 명을 한 번에 인사조치하는 게 아니어서 충격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황제노역 판결로 인해 추락한 사법부의 신뢰를 쌓아야 할 것이다.

/고운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