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뉴스

중복(中伏)을 전후하여 사흘째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간간히 내리는 장마비 때문에 높아진 습도는 숨을 막히게 하고, 이러한 날씨는 괜시리 사람들을 짜증나게 한다. 이른바 ‘불쾌지수’가 높이 올라간 여름날 오후의 일이다.

석달 단위로 타다먹는 당뇨약이 바닥나 처방전을 받아야 해 단골병원엘 가기위해 사무실을 나와 증심사 종점행 54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무더위에 지친 탓인지 때때로 들을 수 있는 친절한 기사님의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도 들을 수 없었다. 하기야 오늘처럼 후덥지근한 날씨에는 핸들을 잡는 것만도 진땀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빈 좌석에 몸을 의지하고 시원한 부채질로 땀을 식히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버스가 학동시장 앞에 정차하니 60대 중반의 남성 한 명과 허름한 옷차림의 50대 중반의 여성 한 명이 함께 승차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여성이 먼저 올라오고 그 뒤를 이어 남성이 차에 올랐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나 또한 그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일상의 한 단면으로 보아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먼저 차에 오른 여성이 ‘교통카드’가 없었던지 천원짜리 두장을 손에 쥔채 뒤에 오르는 남성에게 “아저씨 먼저 하시요”라며 요금처리 순서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현금 계산의 경우 지폐를 넣고 동전을 거슬러 받는데에 다소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요금처리가 신속한 교통카드 소지자에게 순서를 양보한, 그야말로 선의(善意)의 행동인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버스기사가 개입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나름으로는 승차를 원활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의 순서 양보이니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한마디면 모든 것이 OK 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 “이 양반아! 순서대로 하지, 왜 복잡하게 하고 글허요! 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 여성을 질책한 것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도 전혀 그러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 여성의 옷차림이 허름하지 않았어도 그러했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르지 못한 앞니의 아주머니 입에서 거친 항의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아니 기사 아저씨! 지금 뭐라고 나한테 나무라요” “내가 뭣을 잘못했다고 그러요? 나 별꼴을 다 보겠네.” 이쯤 되면 두 사람 간에는 이미 이성(理性)은 간 곳이 없고, 오직 감정만 솓구쳐 오르는 상황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잠시의 기다림도 없이 버스 기사 아저씨의 감정 섞인 대꾸가 이어진다. “저 아주머니가 왜 저런다야? 이 양반아 탄(승차한) 순서대로 하라는 것이 뭣이 나쁘요. 아무래도 뭣을 잘못 먹었는 갑구만*” (* 모양이구만'의 전라도 사투리)

뭣(무엇)을 잘못 먹었다는 말은 상대방을 정신이상자 정도로 치부하는 말이니 아주머니가 더욱 벌끈할 것은 불문가지이다. “아니 뭣이라고, 저 아저씨 아무래도 안 되겠네. 야! 새끼야 경찰서로 가자! 순서를 양보한 것이 뭣이 그리 잘못했다고 시비를 한다냐, 경찰서로 가장께!”

억울함에 흥분을 참지 못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아주머니도 그렇지만 “그럽시다, 경찰서로 갑시다.”라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며 버스를 도로 가에 멈춰 세워 버리는 버스 기사 양반도 참으로 딱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버스기사라는 직업은 서비스업에 속하는 것이며, 그 가장 중요한 덕목(德目)은 안전운행과 함께 승객을 친절하게 모시는 것이 아닌가.

이쯤 되면 후덥지근한 장마철 오후에 버스에 몸을 싣고 있는 우리네 승객들의 처지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곤혹스러운 입장에 놓인 사람은 승객들 가운데에서도 바로 나였다. 아주머니가 서 있는 곳이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이어서 흥분에 겨워 씩씩대며 말싸움을 계속하는 그녀의 입에서 튀겨나 온 침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았고, 심지어는 얼굴에까지 튀겨왔기 때문이다.

이 무슨 낭패인가. 태우러 가겠다는 아내의 전화에 “버스 타고 이동할 테니 걱정 말고 집에 있소”라며 사양 했던게 후회되었고 나도 모르게 짜증이 솟는 것을 어쩔 수 없어 “여보시요! 침 튀어오요, 그만 하시오.” 라는 항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옳지 않은 버스기사의 처신을 가까스로 참고 있던 참에 머리와 얼굴에 잔뜩 뒤집어쓴 침 세례에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기사에게도 “여보시오 기사양반! 그만하고 갑시다.” 라는 불쾌함이 잔뜩 섞인 항의를 하게 되었고, 나의 말에 차 속의 여기저기에서 “그만 갑시다.”하는 항의가 이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승객의 항의와 기세(氣勢)에 눌린 기사는 마치 차를 멈춰 세운 모든 잘못이 아주머니에게 있다는 듯이 “가도 되겠습까?라며 황급히 운행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억울한 쪽은 아주머니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계속하여 소리를 질러대더니 두 정거장에서 “상놈의 새끼야, 운전수 잘해 먹어라.”는 악담(惡談)을 퍼부으며 차에서 내려 버렸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 버스 한번 탔다가 침 세례를 뒤집어 쓴 나는 병원을 거쳐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머리칼과 얼굴을 문질러 대는 수밖에 없었다.

오수열<조선대 교수·한국동북아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