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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석 칼럼>상실의 시대 | | | 입력시간 : 2017. 06.29. 00:00 |   |
우리나라엔 매국노 ‘이완용’이 있는데 중국에는 억울한 매국노 ‘오삼계’란 인물이 있다.
그는 민족의 반역자로 명나라를 배신하고 산해관의 문을 열어 청나라(후금)를 대륙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진원원이라는 여자의 미모에 빠져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해서 더 비난받는다.
그래서 많은 소설과 드라마 속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속내를 살펴보면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완용 또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온 일경에게 대궐 문을 열어 준 우범선을 떠올린다. 허나 오삼계는 달랐기 때문이다.
오삼계는 명나라 말 유명한 장수였다. 그는 호시탐탐 명나라를 노리는 청나라를 방비하기 위해 최전선인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다.
청나라는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수차례 공격했으나 오삼계에게 막혔고, 오히려 많은 피해만 당했다. 그렇게 용맹하게 청나라를 막았던 오삼계는 왜 순순히 문을 열어줘서 배신자가 됐을까.
명나라 말, 안으로는 정국이 혼란해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고 외부로는 청나라가 호시탐탐 대륙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최고의 적을 청나라로 보고 산해관에 정예병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그런데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농민반란군이 세를 얻으면서 중앙정부를 위협했다. 명나라는 진압군대를 보냈으나 예상외로 참패했다.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은 이기세를 틈타, 순신간에 주요 도시를 점거하고 심지어 수도인 베이징(北京)마저 점령해 명나라를 멸망시킨다. 찬란했던 왕조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명나라가 멸망했을 때도 오삼계는 대군을 거느리고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지원을 가기도 전에 순식간에 수도가 함락되고 만 것이다. 오삼계에게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은 자신의 주군을 무너뜨린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이자성과 청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삼계는 고민에 빠진다. 또한 당시 그의 가족은 베이징에 있었는데, 이자성은 오삼계의 가족을 인질로 삼았고 이자성의 휘하 장수였던 유종민은 오삼계의 애첩 진원원을 취한다. 진원원은 천하의 미녀로 기녀 출신이었다.
오삼계가 그녀를 특히 아꼈기에 당연히 화가 치미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자성은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을 공격해 온다. 이렇게 되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고, 청나라는 투항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결국 오삼계는 청에 투항한다. 엄밀히 말해 오삼계는 이완용이나 우범선처럼 적 일본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매국노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이후 오삼계는 청나라를 도와 이자성의 반란군을 토벌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평서왕에 오르고 지금의 원난지방을 다스리게 된다.
거의 독립적인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강희제가 그의 작위를 폐하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삼번의 난이라고 한다. 결국 오삼계는 전투중에 병사하고 그의 세력은 청나라에 패하고 만다.
오삼계가 이처럼 악명을 얻게 된 것은 어쩌면 청나라의 주도면밀한 공작의 결과였을 수도 있다.
그들의 지배 대상이었던 한족이 증오할 만한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청나라는 베이징에 입성할 때,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왕조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장례복을 입을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렇게 오삼계는 지금도 모든 오명을 뒤집어 쓰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를 접하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매국노 대명사… 억울한 ‘이완용’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지만 이완용은 중국의 ‘오삼계’를 닮은 사람이 아니다.
오직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 이완용일 뿐이다.
/고 운 석<시인>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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