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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화순 광부 학살사건을 아시나요? | KBS광주 ‘화순 칸데라 1946’ 29일 방영
미군정이 저지른 1946년 화순탄광 사건
| | | 입력시간 : 2018. 08.28. 00:00 |   |
KBS 광주방송총국은 오는 29일 밤 10시 KBS 1TV에서 특별 기획 ‘화순 칸데라 1946’를 방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질곡의 역사에 묻힌 1946년 화순 탄광 사건을 조명한다. 1946년 8월 15일 화순 너릿재에서 최저임금제 보장을 외치다 미군에 희생당한 화순 탄광 광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미군정기 진정한 해방을 꿈꿨지만 미군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이념적 색채를 뒤집어쓰고 스러져 간 민초들의 아픔이 담겼다. 제작진은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을 찾기 위해 전국을 찾아 다녔고, 당시 사건을 객관화하기 위해 기존에 공개된 미군정 보고서 뿐만 아니라, 최근 공개된 보고서를 샅샅이 뒤졌다.
‘화순 칸데라 1946’은 화순 탄광 사건을 비롯해 제주 4·3과 여순사건 등에 대해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를 바로 잡는 일이 시급함을 역설한다.
◆1946년 화순탄광 사건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 중앙연구원
광주에서 너릿재 터널을 빠져나오면 시원하게 뻗은 화보로를 통해 화순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너릿재 정상에 올라 화순에 들어서게 되면, 화순의 또 다른 고개인 흑토재가 떠오른다.
너릿재는 미군정기 생계 보장과 자주 관리를 요구했던 화순 탄광 노동자들이 학살된 아픈 역사를 가진 고개인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의 노동 운동은 일제 강점기 비합법 운동을 탈피하여 대중 조직으로 ‘노동조합’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땀 흘려 일궈온 공장, 광산 등의 경영 주체야말로 노동자 자신임을 표명하며, ‘자력에 의한 접수 관리’와 ‘생활권 보장’을 요구하며 사업체 접수 운동에 나선 것이다.
화순 탄광 노동자들 역시 일본인들이 떠난 광산에 대해 경영 주체자로 나서며, ‘자치 위원회’를 조직하여 탄광을 스스로 경영하기에 이르고, 이와 별도로 ‘노동조합’을 결성해 활동하게 된다.
화순 탄광 노동자들은 자치 위원회를 조직하고 광산을 부흥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 점차 생산율이 올라 일제 강점기에는 광산 노동자 2,500명이 한 달에 겨우 석탄 7, 8천 톤밖에 생산하지 못했던 것이 1,300명 노동자가 한 달 평균 석탄 1만 3천여 톤을 초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정의 화순 탄광 접수]
하지만 1945년 9월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부로 조선 군정청이 취득하고, 재산 전부를 소유함”이라 선언하고, 한국인에 의한 공장, 광산 등의 접수를 불법으로 간주하게 되면서 노동자들과 미군정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더구나 미군정은 노동자들의 노동 쟁의를 금지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덧붙여 미군정 이후 점점 열악해져가는 노동 조건과 실업 사태, 생필품 부족으로 물가가 폭등해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지고, 전국적으로 쌀을 요구하는 대중 투쟁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화순 탄광에 대한 미군정의 간섭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직후 화순 탄광은 남한의 석탄 생산 제3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미군정은 주요 석탄의 생산지였던 화순 탄광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11월 초 미군은 화순 탄광에 들어오게 된다. 당시 점령 작전의 총책임자였던 미군대위 율러는 탄광을 무조건 접수한다고 공표했고, 서울에서 함께 내려온 우파 계열 인사 임성록을 화순 탄광 소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이 임금 투쟁이나 파업을 한다면 징역 5년을 살게 하겠다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미군정의 조치는 당시 활동하고 있던 화순 탄광 자치 위원회와 노동조합을 무시한 처사이며, 이에 노동자들은 즉각 반발하게 된다.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봉기]
화순 탄광을 접수한 미군정은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24시간 이내로 떠나라고 하고, 인원을 감축한다는 이유로 노동자 100여 명을 해고시켰다. 이에 화순 탄광 노동자들은 1946년 2월 24일 ‘전종업원대회’를 열고 “최저 생활 확보 임금제를 실시하라”, “무조건 해직자 즉시 복직시켜라”, “후생 시설을 정비하라”, “소장 독재 배격”, “불량임원 축출”, “일요 완휴제를 확정하라” 등 6개 항목을 수차례 호소하기에 이른다.
미군정과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갈등은 더욱 치열해지는데,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일 사건’이 너릿재에서 발생하게 된다.
화순 탄광 노동자들이 기념식 참여를 위해 광주 진입을 시도하다가 미군과 충돌사건이 터진 것이다. 1천여 명이 넘는 탄광노동자들은 광주 방향으로 행군했고, 화순, 너릿재를 지날 때쯤 미군과 경찰이 트럭과 장갑차로 탄광 노동자들의 행렬을 저지하고 이 과정에서 총격과 폭행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광주로 진입하려던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행렬은 너릿재 정상까지 ‘토끼몰이’하듯 쫓겨 와 30여 명이 학살당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하게 된다.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마지막 항쟁기는 1946년 10월 추수 항쟁 기간의 식량 투쟁사건이다. 1946년 10월 31일, 화순 탄광 노동자 3천여 명은 노동조합 간부의 인솔 아래 광주로 행진하려고 했다.
이때 행렬 속에는 아이를 업은 부녀자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쌀을 달라고 요구하고,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했다. 이후에도 화순 탄광 노동자들과 미군정 사이에 사건들이 속출하는데, 1946년 11월 4일에는 미군정의 기습검거 작전으로 노동자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당했으며, 급기야 화순군수가 화순 탄광에 폐쇄령을 내리게 된다.
11월 6일에는 75명의 노동자들이 체포되었고, 11월 9일에는 경찰서를 공격하던 1천여 명의 노동자들 중 3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화순 탄광 노동자들에 대한 이와 같은 억압으로 화순 탄광 노동조합은 1946년 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고, 여순 사건과 6·25 전쟁을 겪게 된다. 결국 해방 후 찾아왔던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짧았던 해방은 검은 흙더미에 묻혀버렸다.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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