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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慘史]軍, 민간인 학살의 기록. 화순의 비극 (2) | [민간인 학살의 기록..전라남도 화순] 국군의 만행..비극의 시작 "겁도 아니게 죽였어"
공비 100명?…"민간인을 공비라고 사살 ....이제 군민의 힘으로 원한을 풀어야! | | | 입력시간 : 2021. 07.10. 00:00 |   |
 | 화순을 피로 물 들인 화학산 |
| 이 글을 인용 보도한 이유는 화순의 비극을 군민 누군가가 파 해쳐야 한다는 파인뉴스 대표에 의해 5편까지 연재 할 계획 이며 1편에 이어 2편은 금주 토요일 부터 매주 화순의 가슴아픈 참사를 연재한다.
따라서 화순군민의 지도가 되려면 이 참사를 파해쳐서 군민의 아픔 가슴을 쓰러 내려 야 할 것이다. [파인뉴스 편집자]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했던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을 인용 편집한다.
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필자(정찬대 기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 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다. 제주 4.3, 여순 사건에 이어 화순군민의 학살의 피해도 조명해야 한다.[파인뉴스 주장]
◈비극의 시작…"겁도 아니게 죽였어"
'치이익, 치익'…"하갈마을에 빨치산 주둔 파악, 이동 후 전원 소탕바람."
1950년 11월10일, 백아산 빨치산부대 고립작전을 펴기 위해 화순 이서면으로 향하던 국군 제11사단 20연대 3대대 12중대는 급히 상부의 무전을 받고 하갈마을이 있는 담양군 대덕면 갈전리로 향한다.
하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하루 전 반군은 이미 수양산을 벗어나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있던 백아산으로 후퇴한 뒤였다. 산정, 월곡, 하갈마을의 비극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다.
수양산을 넘어온 12중대는 산 아래 산정마을(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에 다다랐다. 산정과 하갈마을(대덕면 갈전리)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또 산정 아랫동네인 저심마을(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을 지나면 이곳의 행정구역은 화순군 북면 맹리(맹촌·월곡마을)로 바뀐다. 그리고 월곡과 하갈마을은 화순과 담양의 경계가 되는 887번 지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접해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행정구역만 다를 뿐 이곳 모두 화순 생활권에 포함돼 있다.
산정사람 모두를 집결시킨 군인은 마을 인민위원장과 그 가족부터 찾았다. 1950년 7월 인민군이 화순을 점령한 이후 퇴각기인 9월 말까지 이들은 리(里)와 면(面) 단위에 리 인민위원장(이장)과 면 인민위원장(면장)을 두고 화순 곳곳을 통제해왔다. 또 여성동맹위원장(부녀회장)을 두기도 했다.
당시 산정마을 (리)인민위원장이던 고광하 씨는 출타 중이었고, 그의 모친 박모 씨(당시 56세)와 형 고광을(당시 37세), 동생 고광철(당시 21세), 고광하의 부인 박길남(당시 23세) 씨가 군인들 앞에 섰다. 또 여성동맹위원장 김영랑(당시 25세) 씨도 함께 불러냈다. 머리에 총구를 겨눈 군인들은 "네놈들 모두 빨갱이와 똑같다"고 말한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관자놀이에선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뒤이어 나머지 주민들도 일렬로 세워 사살했고, 그 자리에서만 20여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그곳에 정연태(당시 20살·현재 작고) 씨도 있었다. 조선대학교 법학과 1학년이던 그는 어수선한 시기에 학교를 가지 않은 채 집에 있었다. 군인은 정 씨의 가슴팍에 총부리를 들이댔다. 정 씨는 "조대 법대 학생인데, 왜 우리를 죽이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공포감 때문에 목소리는 울먹였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탓에 눈빛은 결기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군인들도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이내 정 씨를 매섭게 쏘아봤다. 차가운 분위기를 뚫고 군 장교 중 한 명이 "아무개 교수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 씨는 "제 은사님"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의 신분을 확인한 뒤 총을 거뒀고, 그에게 길 안내를 지시했다.
정 씨의 안내를 받은 12중대는 산정과 내심마을을 지나 맹리로 향했다. 맹리2구인 월곡마을에 도착한 군인은 또 다시 야수로 돌변한 채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어냈다. 그런 뒤 젊은 사람 위주로 빨갱이 부역 혐의를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순(당시 38세) 씨가 그 자리에서 사살됐고, 그의 부친 정충래(당시 74세) 씨는 "왜 내 아들을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자식 뒤를 이었다.
1월27일 맹리에서 만난 임봉림(여·71세) 씨는 취재진을 향해 "겁도 아니게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당시 6살이던 그는 길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에 사람들을 눕혀놓고 총질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들이 그런 시상을 살았어, 그런 거 생각하면 짠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당신 스스로 한 많은 삶을 살았지만, 부모세대는 더했다는 것이다.
12중대는 이곳에서 몇몇 젊은이를 포박한 뒤 길 건너 하갈마을로 이동했다. 그리고 하갈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학살'이 단행된다.
다음주 제 3편 연재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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