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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3일
<강원구 칼럼> 영원한 2인자, 주은래(周恩來)


2013년 12월 20일 00시 00분 입력

2인자의 자리는 항상 최고 실권자로부터 견제를 받기 때문에 똑똑하지도, 못나지도 않아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북한의 장성택은 김일성의 사위이니까, 부마(駙馬)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많은 여자를 거느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왕의 사위인 부마는 공주 단 한명만 두어야 한다. 장성택이 다른 여자들을 좋아 했으니, 김경희와 관계는 좋을 리 없을 것이다.

중국에 돌아다녀 보면 모택동(毛澤東)의 기념관보다 주은래 기념관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중국에서 모택동 다음의 2인자로 끝까지 대접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김종필 총리가 중간 중간 버림을 받았으나 2인자의 자리를 유지했으며, 장성택은 40여년간 완전히 누렸으나 불과 며칠 만에 사형되고 말았다.

주은래는 중국공산당의 주요인물이며 중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후에 중국정부의 외교문제를 전담했다. 중국공산당 초기부터 지도자적 역할을 했으며, 위대한 정책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는 정책 시행에 뛰어났고 세부사항을 파악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언제나 당 지도부에서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내부 갈등으로부터 비롯된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우아함과 섬세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친화력있고 실용적이며 설득력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강소성 회안(淮安) 명문가에서 태어나 천진(天津)에 있는 남개[南開]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 요녕성 철령(鐵嶺)에서 6개월간 공부하였으며, 그 뒤 계속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며, 1920년 가을에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남창(南昌) 사건(1927. 8. 1)으로 알려진 공산당 봉기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당이 남창을 재탈환하자 광둥 동부지역으로 퇴각했고 곧 홍콩을 거쳐 상해로 도피했다.

모택동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평생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장개석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인해 공산당은 마침내 1934년 10월 강서 소비에트 지역을 버리고 중국 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를 향해 1935년 10월 섬서성 연안(延安)에 이르러 장정은 끝났다.

이곳에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보하자 주은래는 당의 주요 협상자가 되었고, 국민당과 전략적으로 연합을 맺는 어려운 일에 착수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항일감정에 호응하고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모스크바의 이른바 신(新)인민전선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 국민당을 비롯한 모든 애국인사들과 연합하겠다고 제의했다.

1936년 겨울 장개석이 국공내전을 중지하고자 하는 부장(部將)들에 의해 서안(西安)에서 체포되자 주은래는 곧 그곳으로 갔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장개석을 살해하지 말라고 설득한 뒤, 장개석이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편다는 조건 아래 그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총리가 된 주은래는 중국의 대규모 민간 관료체제를 관리하는 주요행정가가 되었다. 외교부장을 겸임하면서 외교문제에서도 중책을 수행했고 이 직책을 사임하고 난 뒤에도 계속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북경을 방문하여 주은래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북경에서 열린 모택동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이의 역사적 회담은 대부분 주은래가 조직·성사시킨 것이었다.

주은래는 공산당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끝까지 유지했다. 문화대혁명 이후에 임표(林彪)에게 밀렸지만, 문화대혁명 기간에 모택동 사상을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주된 역할을 했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유일하게 안정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쇠퇴하는 동안 등소평(鄧小平)과 기타 전직 온건지도자들을 권좌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영원한 2인자로 지금도 대접 받고 있다.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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